올초부터 주관사 지원사격↑…'GS건설 사태'도
증권사 수임경쟁 심화…"발행사 갑질이 근본 원인"
금융당국 조치 필요성 목소리…"여론 더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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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회사채 수요예측에서 주관사들이 무분별한 저금리 입찰에 나서며 가격 결정의 공정성을 해친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주관 실적을 올려야 하는 증권사들은 발행사 우위 시장에서 '어쩔 수 없다'고 토로하지만 주관사의 말을 믿고 채권을 사는 기관투자자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발행사와 주관사가 자체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터라 시장에선 금융당국이 나서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반면 금융당국에서는 자기 실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리하는 상황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라 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롯데쇼핑 회사채 거래가 도마 위에 올랐다. 이달 10일 발행한 롯데쇼핑 회사채가 발행 직후 유통 시장에 낮은 가격에 대량 풀렸는데, 주관 증권사들이 낮은 금리로 수요예측에 참여했다가 손해를 감수하며 매도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2년물에 고금리 수요가 집중되자 주관사들은 낮은 금리로 입찰해 발행 금리를 '방어'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들은 애초 채권을 길게 보유할 목적이 아닌 데다, 향후 금리 변동성과 롯데쇼핑 신용등급 하락 가능성 등을 감안해 '빠른 손절'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원칙적으로 공모채 발행 대표주관사는 수요예측에 참여하지 못한다. 금융투자협회의 '회사채 수요예측 모범규준'에 따르면 회사채 발행을 주관하는 증권사는 유효수요가 발행 예정 금액 이상일 경우, 해당 채권을 직접 인수할 수 없다. 수요예측에서 미매각이 발생하거나, 발행조건 확정 이후 투자자의 미청약·미납입이 발생할 경우에만 주관사가 인수할 수 있다.
다만 만기가 다를 경우 별개의 채권으로 간주한다는 금융위원회의 유권해석이 있다. 이를 근거로 증권사들이 주관을 맡지 않은 트렌치에 조직 내 리테일 부서를 동원해 저금리 입찰에 나서는 관행이 공공연하게 업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기관투자가들은 피로함을 토로하고 있다. 기관들이 '오버 금리'로 주문을 넣어도 주관사들이 개별민평 이하인 언더 금리로 주문 몰아 넣으면 최종 발행금리가 낮게 형성돼 가격이 왜곡된다는 것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주관사들이 허수 입찰로 낮은 회사채 금리 형성을 유도하면서 기관들에겐 좋은 회사채니 사라고 하지만, 본인들은 그 직후 헐값에 팔아 시장을 어지럽히고 있다"며 "국내 회사채 시장 가격 왜곡이 점점 심해지면서 '요샌 회사채 안본다'는 투자사도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주관사들의 '저금리 베팅'은 올해 유난히 두드러진다. 지난 2월 말 LG전자는 약 2년만에 100회차 회사채 수요예측에 나섰는데 2조5850억원으로 사상 최대 수요를 모으며 흥행했다. 입찰 참여자들이 모든 트렌치에서 밴드 최하단인 -30bp보다 낮은 금리 구간에서부터 주문을 넣은 결과다. 앞서 SK E&S,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포스코케미칼, 한화토탈에너지스, 롯데칠성음료, CJ ENM 등도 대표 주관사단의 저금리 입찰 덕을 봤다는 평가다.
이는 대표주관 수임 경쟁이 심화한 데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레고랜드 사태 등 시장이 얼어붙은 영향으로 올해 실적을 올려야하는 주관사들은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고 있다. 부동산 PF, 해외 대체투자, IPO 등 증권업계 전반이 부진해 비교적 ‘안전한’ 채권 부문에서 실적을 내야하는 부담도 늘었다. 미래에셋증권, 신한투자증권 등 DCM 부문에 크게 공을 들이지 않았던 곳들도 올해부터 분위기가 달라졌다.
증권사들은 수임도 수임이지만, 기존 기업 고객들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지원사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발행사의 최우선 목적은 조달 비용을 낮추는 것이니 금리를 낮추기 위한 발행사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올초 'GS건설 사태' 이후 발행사 우위 시장의 부작용이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는 평이다. 올해 2월 GS건설이 회사채 발행 과정에서 가격 결정 원칙을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발행금리를 낮춰 채권을 발행하기로 하면서 논란이 됐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정상적인 영업으로는 실적을 올리지 못하는 증권사들이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면서 시장이 혼탁해졌는데, 지난 GS건설 사태를 유야무야 넘어가서 계속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금융당국에서 시장 정상화를 위해 조치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다른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실적이 급한 증권사들은 여전채라도 많이 찍어서 목표 주관 물량을 채우려고 하고 있다"며 "일부 여전채 발행사들은 '낮은 가격으로 인수하지 않으면 나중에 일감을 주지 않겠다'고 대놓고 협박하기도 하는 등 요즘 회사채 시장에선 수요예측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 수준의 '갑질' 문화가 되살아난 것 같다"고 말했다.
증권사들과 기관투자자 등 시장 관계자들은 금융당국이 시장 정상화를 위한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이다. 증권사 사이에선 경쟁사들이 공격적인 영업에 나서며 물량을 늘려가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회사채 발행과 주관, 인수는 각 당사자들의 시장 상황과 각자의 처지에 따라서 진행되는 '사적 계약의 영역'으로 볼 수 있다. 싸게 채권을 찍자고 주관사를 닦달하건, 주관사가 자금을 관계유지를 위해 자본을 쓰든 알아서 판단할 문제라는 것이다.
일부 금융당국의 개입이 필요한 면도 있어 보인다. 싸게 사는 것까진 자유지만, 자기는 금방 팔 채권을 다른 기관에는 '좋은 자산'이라며 광고하는 것은 모순적 행동이라는 것이다. 지난 수년간 금융사고가 빈번했던 터라 지금 이런 '부정한 광고'는 문제의 소지가 크다.
물론 금융당국이 개입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당사자들이 자기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것은 제지하거나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시장 가격 왜곡이 적절치 않아 보이는 면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행정력'을 들일 만큼 중한 사안으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증권사가 스스로 부담을 졌던 만큼, 알아서 풀어야 한다는 시선도 있다.
당국에서는 시장 개선의 필요성은 인지하지만 주관사들이 '무리한' 영업을 한 것까지 적극 나서 교통정리 해주긴 어렵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일부 증권사가 이와 관련 유권해석 등을 요청해둔 것으로 알려졌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답변을 내놓지 않을 것으로 파악된다. 올해 증권업계 내 다른 화두가 많은 터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회사채 시장까지 살필 여유가 많지 않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시장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점을 알고 있지만 당국에서 특정 조치를 준비 중이라고 말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다"라며 "향후 계획은 결정된 바 없고 여론을 좀 더 파악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