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권시장 경색에 여전사 채권 발행 타격
고금리·단기 채권 차환 발행 움직임 꿈틀
증권사는 돈 안되고 불안한 여전채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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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말 강원도는 ‘레고랜드’ 조성 사업을 위해 일으킨 프로젝트의 대출금을 갚지 않겠다고 했다. 지방 정부가 낸 사실상의 채무불이행 선언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이 차갑게 식었다. 금융 시스템 위기로 확산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커졌다.
직접금융 시장이 위축되며 기업과 금융사 모두 채권 발행에 애를 먹었다. 채권 의존도가 높은 캐피탈사가 가장 타격이 컸다. 그 중에서도 금융지주나 대기업의 우산 밖에 있는 독립계 캐피탈사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데 진땀을 뺐다. 만기를 수개월~1년으로 줄이거나 발행 규모를 축소하는 사례가 많았다. 자금을 못 구하니 투자나 자금 운용도 쉽지 않았다.
채권 시장의 단골 손님인 한 독립계 캐피탈사는 작년 9월 초 1년물 채권을 5.4% 수준 금리로 발행했는데, 두 달 후에는 7% 이상의 금리를 주고야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다른 독립계 캐피탈사도 작년 9월 하순에 5%대 금리로 세 차례 채권을 발행했는데, 그해 11월엔 8%에 육박하는 금리를 주고야 채권을 찍을 수 있었다.
레고랜드 사태 후 어렵사리 발행됐던 여신전문채권(여전채)들이 발행 1년 후부터 순차적으로 만기가 도래한다. 이들 채권을 차환하기 위해 증권사를 찾는 캐피탈사들의 움직임도 분주해지는 모습인데, 증권사 입장에선 캐피탈사의 채권 발행 요청을 썩 반기기엔 부담스럽다.
증권사에 있어 여전채는 '계륵' 같은 존재다. 캐피탈사들이 일상적으로 채권을 찍다 보니 발행 물량은 많지만, 상투적인 일이라 발행 수수료가 박하고 수익성이 높지 않다. 손꼽히는 대형 증권사간 ‘발행 규모’ 경쟁의 소재긴 하지만, 크게 돈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아는 캐피탈사들은 최대한 유리한 발행 조건을 따내려 증권사들을 압박한다. 무리해서 인수하고 또 문제가 되는 악순환이 벌어지기도 한다.
한 증권사 채권 담당 임원은 “여전채는 발행은 많지만 증권사 입장에선 크게 돈이 되지 않는다”며 “수익성은 낮음에도 발행 규모로 경쟁해야 하는 증권사 입장에선 캐피탈사 채권을 다루지 않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증권사에 더 큰 부담은 ‘미매각’ 우려다. 작년 하반기 이후 부동산 PF, 해외 부동산 투자 등에 묶인 자금이 많은 상황이다. 여러 대형 증권사 임원들이 ‘묶인 자금’ 때문에 자리를 떠났고, 아직도 미매각에 발목잡힌 곳들이 적지 않다. 이에 실적 압박이 있는 증권사들조차 미매각이 날까 무서워 여전채를 다루는 데 부담을 느끼고 있다.
작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여전채에 대한 투자 수요는 여전히 많지 않다. 올해 들어 시장 상황이 약간 풀리면서 작년의 금리 매력도 약해진 분위기다. 국내외 경제 정세를 살펴 보면 아직 채권 시장의 불확실성이 걷혔다 보기 어렵다는 시선도 있다. 작년보다는 나아졌다지만 ‘채권 종목’ 중 가장 투자자의 외면을 받고 있고, 시장이 출렁이면 가장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증권사 경영진, 임원진과 실무진의 입장도 사뭇 다르다. 수뇌부야 발행 실적 트로피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일을 해야 하는 입장에선 특별한 금전적 성과가 없고 대응하기 피로한 여전채를 다루는 것이 탐탁지 않다.
다른 증권사 채권 담당 직원은 “여전채는 투자은행(IB) 역량과는 무관하지만 경영진은 눈에 보이는 숫자 때문에라도 무시하기 어렵다”며 “여전사들에 힘의 무게 중심이 가 있는 상황이다 보니 ‘좋은 금리에 채권을 발행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는 없다’ 등 갑질을 하는데 실무자로선 이를 무시하기 쉽지 않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러니 채권을 발행하되, 받아갈 수 있는 수요처를 찾는 것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최근 세간에 모 자산운용사 임원이 대형 증권사 직원과 실랑이를 벌인 것이 화제가 됐다. 임원이 먼저 문제를 일으켰는데 직원이 그에 대응한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증권가 채권 담당자 사이에선 ‘맞대응’으로 일을 키우기보다, 이를 빌미로 운용사에 ‘여전채 떠넘기기’를 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란 푸념도 나오는 분위기다. 그만큼 여전채 소화가 쉽지 않다는 방증이란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