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시장 버티고 신용 위험 터지지 않으면 '경기 연착륙' 가능
국내 증시 변수 외국인 투자자 이탈은 지속...'공매도 금지' 여파
내년 '밸류'보단 '모멘텀' 장세 펼쳐질듯...극심 변동성 가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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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준금리가 '높고 길게'(higher for longer)인 것이 아니라, 나스닥 지수가 '높고 길게' 갈 것이란 농담이 나돌 정도입니다." (한 투자자문사 운용역)
'디스인플레이션 시대'(물가 상승이 서서히 완화되는 시기)가 성큼 다가오며 그간 자금시장과 증시를 옥죄던 금융긴축 여건 또한 완화될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지난 가을 증시를 지배하던 오버킬(over-kill;과잉 긴축으로 인한 경기침체) 우려는 걷히고, 내년엔 물가 안정과 경기 회복 기대감이 나타나며 올해보다 한결 나은 상황이 펼쳐질 거란 낙관론이 점점 커지고 있다.
다만 '일일 천하'로 그친 공매도 금지 정책의 여파는 이런 낙관론을 상쇄하는 역효과로 작용할 전망이다. 긴축의 여파로 증시 수급이 여전히 좋지 않은 상황에서, 공매도 금지 이후 외국인들이 국내 증시를 등지고 있는 까닭이다. '여건은 플러스지만 정책이 마이너스라 결국 제로'라는 푸념이 증권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온다.
15일 발표된 미국 10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시장 전망치보다 낮았다. 전년대비 3.2% 오르는 데 그치며 2%대 진입을 눈 앞에 뒀다. 근원 CPI 역시 전년대비 4.0% 오르며 전망치를 0.1%포인트 하회했다.
이는 지난 2년간 글로벌 자본시장의 가장 큰 이슈 중 하나였던 '인플레이션'(물가상승)이 잡혀간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향후 전망도 일단은 안정적이다. CPI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주거비의 월간 상승률은 '질로 렌트 지수' 기준 코로나19 시기 이전으로 돌아왔고, 유가 역시 지난 9월말 배럴당 90달러까지 올랐던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 가격이 70달러대 중후반으로 뚝 떨어졌다.
10월 CPI 발표 이후 미국 시장은 축포를 터뜨렸다. 나스닥 지수는 2.37% 급등하며 1만4000선을 다시 넘어섰다. 이달 초만 해도 105.5까지 올랐던 미국 달러 지수는 단숨에 103.9까지 떨어졌고, 이에 힘입어 9월 이후 상승세를 보이던 원달러 환율 역시 1300원대 극초반으로 안정화했다. 한때 5%선을 넘나들며 자금시장에 공포감을 줬던 미국 국채 10년물 금리는 어느새 4.4%대에 진입했다.
신영증권은 "그간 꼼짝도 않던 미국채 초단기물(T-bill) 6개월물 금리가 소폭 하락하며 6월 이후 처음으로 5.4%대로 내려왔다"며 "6개월물 T-bill은 향후 6개월간 기준금리 기대값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아 '상반기 인하론'이 슬슬 고개를 들고 있다는 의미"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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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글로벌 물가가 폭등한 건 대규모 재정지출에 공급망 차질, 리오프닝(경제 재개)에 따른 수요가 얹어졌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 비용 상승이 더해졌다. 내년에는 이 같은 요인이 대부분 완화하며 물가가 안정적인 추이를 보일 거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기준금리를 높게 유지하는 고강도 긴축의 이유는 물가인데, 물가가 안정되면 고금리를 유지할 이유도 사라진다는 지적이다.
하이투자증권도 "경기 하강 과정에서 고용시장이 버티고 크레딧 리스크(신용 위기)가 터지지 않으면 경기 연착륙 달성이 가능하다"라며 "내년은 물가 안정이 자산 가격을 지지하고 실질소득 회복을 이끌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동안의 긴축으로 인해 경기 하강은 불가피하지만, 일단 내년 증시는 유동성이 받쳐줄 수 있을 거란 예상이 많다. 당장 내년 상반기 중 EU가 미국보다 먼저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할 거란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제조업ㆍ서비스업 구매자관리지수(PMI)는 지난해 말 꼭지 이후 급락해 지금은 기준점인 50은커녕 45를 밑돌고 있다. PMI 지수가 50 이하면 경기 위축을 나타낸다. 이달 초 발표된 EU의 10월 CPI 예비치는 전년대비 2.9% 상승으로, 미국보다 먼저 목표치인 2%대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물가는 잡혔고, 경기침체가 예상되는 상황인 것이다.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도 이전 예상보다 일찍, 더 많이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모건스탠리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내년 6월부터 2년간 기준금리를 총 300bp(3%포인트) 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시카소선물거래소의 국채 선물 상품이 반영하고 있는 내년 6월 미국 기준금리 인하 가능성은 40%까지 올라온 상태다.
문제는 이런 완연한 낙관론의 기운이 국내 증시에 와 닿는 데엔 장애물이 많다는 점이다. 특히 최근 단행된 공매도 전면 금지 조치가 우려의 중심으로 꼽힌다. 국내 증시 수급의 핵심 중 하나인 외국인 수급이 눈에 띄게 약화하며, 내년 중 진행될 글로벌 긴축 완화의 수혜를 온전히 받지 못할 우려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이다.
15일 오전 코스피 지수의 모습이 대표적이었다. 전날 미국 증시 급등과 시장금리 급락의 수혜를 받은 코스피 지수는 전일대비 1.4% 상승 출발하며 호조세를 보였다. 금융투자와 연기금을 위시한 국내 기관들이 장이 열린 후 불과 1시간 동안 무려 4000억원을 순매수하며 만들어낸 상승세였다. 개인들은 매도에 나섰고, 외국인들은 장 초반 오히려 순매도에 나서며 비중을 줄였다. 상승세가 지속되자 외국인도 순매수로 돌아서긴 했지만, 규모는 크지 않았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국내 증시는 반도체ㆍ이차전지 비중이 높은데, 이들 산업의 중기 전망이 그리 밝지만은 않아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서 롱 온니(long-only;매수보유) 전략만으로 접근하긴 쉽지 않은 상황"이라며 "개별종목 선물 역시 수급 부족으로 현ㆍ선물 스프레드(격차)가 커져 헤지(위험회피) 비용이 크게 늘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밸류'(기업가치)보다는 '모멘텀'(경향성)에 따른 증시 움직임을 만들어낼 거란 전망이다. 2021년 반도체주 폭등, 올해 이차전지주 폭등은 제한된 유동성이 특정 산업군에 쏠리며 만들어낸 전형적 '모멘텀' 사례로 꼽힌다.
결국 내년 국내 증시는 ▲금융 여건이 나아지는 가운데 ▲반도체ㆍ자동차 등 핵심 산업군 위주로 경기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지만 ▲공매도 금지로 핵심 투자자군인 외국인이 이탈하며 ▲일부 기관 혹은 개인투자자의 수급 쏠림이 종목별로 극심한 변동성을 유발할 거란 전망이 현재 중론을 이루고 있다.
다른 운용사 운용역은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공매도 금지에 대해 언급한 것을 두고 시장에서는 당초 발표된 기한인 내년 6월 이후에도 공매도 금지가 지속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놓고 있다"며 "외국인 투자자 입장에선 공매도를 전면 금지하면 순매도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