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권주 방지·사전 관계형성 목적으로 풀이…"채권시장化"
치열했던 딜 수임 경쟁…"내년에도 이어질 전망"
-
이어지는 고금리 기조에 높아진 금융비용을 감당하지 못하게 된 기업들이 주식자본시장(ECM)으로 눈을 돌린 한 해였다. 영업환경이 녹록지 않은 곳들이 주식발행에 나서다보니 주관사를 최소 3곳 이상 끼는 데 실권주 발생을 방지하고 여러 증권사와 사전에 관계를 형성하려는 의도란 평가가 짙다.
작지만 다수의 딜이 쏟아졌던 2023년 ECM 시장에서, 주관 순위 우위를 점하기란 쉽지 않았다. 전체 주관 순위 1위를 차지한 NH투자증권과 2위인 한국투자증권의 발행규모 차액이 300억원 수준이다. 주관사 자리를 따내는 것 뿐만 아니라, 기관투자자(이하 기관) 대상 영업을 통해 발행규모를 최대화하려던 노력들이 이어졌다.
올해 유상증자에 나선 대기업 계열사들은 주관·인수사를 여럿 껴 딜을 진행했다. 롯데케미칼은 7곳, 한화오션은 5곳을 꼈다. SK이노베이션은 주관사 2곳을 선정했지만 인수단은 총 4곳이다.
올해에 이어 내년도 경영환경이 어려운 대기업 계열사의 조(兆) 단위 유상증자가 예정돼 있다. 글로벌 디스플레이 영업환경의 악화로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는 LG디스플레이가 그 주인공이다.
LG디스플레이 유상증자 주관사 자리를 점하기 위해 NH투자증권이 제일 먼저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KB증권, 한국투자증권, 대신증권 등이 주관사단에 합류했다. 일각에선 NH투자증권이 선제적으로 영업에 나선 노력 대비 주관사단이 대규모로 꾸려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한 중소형 증권사 임원은 "과거였으면, 1조2000억원 규모의 딜 정도는 NH투자증권과 KB증권 두 곳 정도가 대표주관사로 참여해도 충분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업공개(IPO)도 마찬가지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산로보틱스다. 두산로보틱스는 대표주관사 2곳, 공동주관사 3곳을 선정했고 인수단은 총 9곳의 증권사로 정비했다. 두산로보틱스 딜 규모(4212억원)가 올해 통틀어 가장 컸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딜을 수임한 증권사들의 순위 결정에는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했다. 되레 3분기 상장한 파두 IPO를 주관한 실적의 기여도가 컸다.
물론 대기업 계열사들은 대규모 주식발행시 주관사를 여럿 끼곤 한다. 그러나 올해 ECM을 찾은 발행사들이 대체로 업황이 어려운 곳들이 많다보니, ▲인수단을 여럿 구성해 미매각에 따른 실권주를 방지하고 ▲여러 증권사들과 사전에 관계를 형성해 추후 자금 수요에 대응하려고 한다는 의도로 풀이되는 중이다.
한 증권사 ECM 관계자는 "채권시장에서 신용등급에 대한 평가가 긍정적이지 않아 발행이 어려운 기업들이 주로 ECM 시장을 찾았다"라며 "그간 ECM도 발행사와의 관계가 중요하긴 했지만, 관계를 기반으로 꾸준히 딜을 받아내는 채권시장의 성격이 주식시장에도 전이되고 있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올해 증권사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연초부터 업황 전망이 어두운 대기업 계열사들을 접촉하려는 증권사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어려울 때 도움을 주면 관계 형성이 용이하다'라는 기조 하에서다.
앞서 조달을 도왔음에도 차기 자금 조달에 끼지 못한 증권사들은 아쉬움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CJ CGV다. 2022년 CJ CGV의 영구 전환사채(CB) 단독 주관사로 나섰지만 미매각에 따라 실권주를 안았던 미래에셋증권은 올해 이뤄진 CJ CGV 유상증자엔 참여하지 못했다.
한 운용업계 관계자는 "리스크 분산을 위해 많은 증권사와 접촉한 발행사와, 올 한해 어떻게든 딜을 따려고 노력했던 증권사들의 수요 공급이 맞아떨어진 한 해"라며 "내년에는 SK에코플랜드, LG CNS 등 여러 발행사의 IPO가 예상되고 있고 업황이 어려운 대기업 계열사들도 꾸준히 조단위 유상증자에 나설 것으로 보이는 만큼 치열한 물 밑 접촉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여진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