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주 소속 증권사, ‘책임 다원화’가 핵심…사법 리스크 최소화
책무구조도 시행에 계획했던 매트릭스ㆍBU 체제 철회하기도
오너 회사는 리스크 전담 임원직(CRO)으로 책임 일원화 추세
보상 확실한 오너 회사만이 CRO 강조…중대재해법과 닮은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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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초, 중대재해처벌법(이하 중대재해법) 시행을 앞두고 상공업계에는 안전책임자(Chief Safety OfficerㆍCSO) 임원 자리를 새로 만드는 사례가 급증했다. 삼성전자는 부사장, SK하이닉스와 SK텔레콤ㆍLG에너지솔루션은 사장, 현대차ㆍ기아ㆍLG전자는 대표급의 임원이 CSO로 임명됐다.
그러나 CSO들 사이에서 승진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 사이에선 '우리는 대신 감옥 가주는 총알받이'라는 자조의 목소리가 돌았다.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노동자가 사망하거나 다칠 경우 사업주나 경영 책임자에게 1년 이상의 징역 및 10억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할 수 있다. 이에 경영자들은 책임 회피를 위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고 안전책임자라는 직책을 신설, 사장직을 물려주는 편법을 꾸렸다. 사고가 날 때마다 사업주를 형사처벌한다면 기업 생산성이 떨어지니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었다.
2024년, 총알받이 임원을 임명하는 추세는 이제 금융권에도 번지고 있다. 일명 '금융판 중대재해법'이라는 책무구조도가 올해 전격 도입되면서다.
책무구조도는 금융 사건이 발생했을 때,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이 골자다. 건설현장에서 사고가 발생하면 건설사 대표가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이론상 은행장이나 지주회장이 내부통제 책임을 지게 되는 셈이다.
작년 말부터 이어진 금융권 조직개편도 책무구조도 영향을 최우선으로 두고 진행됐다. 신한금융지주가 올해 BU(비즈니스유닛) 체제를 도입하려 했다가 취소한 배경에도 책무구조도가 있었다.
신한지주는 은행ㆍ카드 등 개인고객 부문, 증권ㆍ캐피탈 등 투자은행(IB)부문, 보험ㆍ운용 부문 등으로 나눠 각 부문을 주력 계열사 대표가 총괄(BU조직장)하도록 기획했다. 그러나 책무구조도 하에서 이 'BU장'의 책임을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명확하지 않았다. 내부통제 이슈 발생시 지주 회장의 책임론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나오자 결국 무산됐다.
KB금융지주도 계열사간 시너지를 강조했던 CIB(기업투자금융) 조직을 없애면서 매트릭스 체제를 최소화했다. 각 계열사가 알아서 관련 조직의 내부통제를 담당하고, 문제가 생기면 계열사 내에서 해결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오너가 있는 금융회사들은 조직개편보다 쉬운 방법을 택했다. 앞선 CSO와 비슷한 CRO(최고위험관리책임자)의 역할을 강화해, 모든 내부통제 책임을 일원화하기로 한 것이다.
미래에셋증권은 리스크관리 부문을 경영혁신실에서 독립시키고, 부사장급을 CRO에 배치했다. 지난해 상무가 맡았던 CRO를 부사장급으로 올려 조직의 체급을 강화한 셈이다. 메리츠증권은 아예 지난해 메리츠화재 CRO 겸 부사장을 맡았던 장원재 사장을 신임 대표로 발탁했다. 대신증권도 리스크부문 전무를 부사장으로 승진시켰다.
지주회사 소속의 증권사는 책임 분산에 초점을 맞췄고, 미래에셋그룹ㆍ메리츠금융그룹ㆍ대신파이낸셜그룹은 CRO의 역할을 강화했다. 오너가 있고 없고에서 갈린 이 차이는 결국 방패가 되어 줄 임원이 자원할 수 있느냐에서 갈렸다는 평가다.
창업주 소유의 금융그룹은 창업주가 뿌리를 내리고 경영을 총괄한다. 오너로부터 월급을 받는 경영인(CEO)들은 오너 일가에 충성, 가신(家臣)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충성 끝에 보상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창업주가 없어 회장직을 때마다 교체하는 지주사는 회장을 향한 무조건적인 희생 및 충성을 요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CRO 선임만으로 그간 느슨했던 내부통제가 갑자기 효율적으로 작동하기는 어렵다. 금융감독원 조사에 따르면 금융사 횡령ㆍ유용 사고 액수 추이는 지난 2019년 111억원에서 2022년 897억원까지 급증했다. 금융권에선 매년 얼마나 많은 오너회사의 CRO들이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인지 시선이 쏠린다.
금융권 관계자는 "올해 책무구조도 시행으로 각 회사마다 임원 개편 과정에서 금융그룹 회장의 책임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했지만, 지주와 지주가 아닌 회사의 대응은 상이했다"며 "지주회사는 사법 리스크를 최대한 여러 부문장(임원)이 나눠 가지는 장치를 고안한 반면, 오너 회사는 이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