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아니다" 투자 계약서 재검토 나선 FI들
"법 어길 회사가 계약 못어길까" 안전장치 한계
11번가 사태로 '콜앤드래그' 가고 '풋옵션 '부상
투자 유치로 끝…"책임 안지는 CEO들 못믿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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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파두 사태’와 ‘11번가 사태’를 겪으며 투자자들 사이에선 남 일이 아니라는 우려가 번졌다. 금융당국이 나서 규정을 강화하고 투자자들은 계약서를 다시 검토하는 등 시장은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분주하다.
다만 ‘꼼꼼한 계약’이 보호하는 범위를 넘는 사건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되면서 시장의 불안감은 여전하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경영진만 믿고 투자를 결정하기는 어려워졌다는 평가도 나온다.
이달 22일 금융감독원은 제2의 파두 사태를 막기 위해 기업공개(IPO) 시 상장 직전까지의 매출액과 영업손익을 증권신고서에 기재하도록 하는 기준을 발표했다. 작년 11월 ‘뻥튀기 상장’ 의혹이 불거진 파두 사태를 계기로 금감원이 상장 심사 기준을 강화하겠다고 예고한 데 따른 조치다.
팹리스 기업 파두는 지난해 8월 기술특례상장을 통해 코스닥 시장에 입성했다.미래 예상실적을 끌어와 1조5000억원의 몸값을 인정받았으나, 2분기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8% 감소한 사실이 '상장 이후' 공개되며 파장을 일으킨 바 있다.
금감원의 이번 조치로 상장하는 기업은 감사받은 최근 분기 다음 달부터 증권신고서 최초 제출일 직전월까지의 매월 잠정 매출액과 영업손익을 투자위험요소에 기재해야한다. 잠정실적과 향후 확정실적과의 차이 발생 가능성에 대해서도 유의사항을 포함해야 한다.
파두 사태 이후 기업들은 논란이 발생할 여지를 없애기 위해 대비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현재 상장을 준비하고 있는 비바리퍼블리카(토스)의 경우 작년 연말 증권사에 RFP(입찰제안요서)를 보내며 회사의 향후 3년간 손익 지표 및 추정 근거를 제시하도록 요구했다.
사모펀드(PEF) 등 투자자들이 느끼는 경각심도 만만찮다. 그동안 프리IPO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재무적투자자(FI) 역할을 맡은 PEF들은 포트폴리오 기업들의 계약서를 재검토하고 있다. 파두 사태 이후 법무법인 등에 계약 내용 및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한 ‘안전 장치’가 잘 갖춰져 있는지 문의가 많아졌다고 전해진다.
계약만으로 제2의 파두 사태를 막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계약서에 회사가 자본시장법 등 관련 규정에 따라 관련 내용을 성실히 기재하라고 명시했더라도 그 효과는 크지 않다. 사실상 법의 규정을 계약에서 한번 더 언급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안전장치로서 실효성은 없다는 평이다.
투자자 입장에서는 실적 공시와 관련해선 너무 ‘깊이’ 관여해도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증권신고서에 구체적인 내용을 담는다 하더라도 이 역시 작성자는 기업이다. 이 수치에 허점이 생기지 않도록 투자자가 적극 개입했다가 나중에 문제가 생기기라도 하면 기업과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법을 지키지 않는 기업이라면 계약도 못 어길 것이란 법이 없고, 계약 위반 시 손해배상을 받겠다 해도 사실상 투자자로서 큰 실익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진퇴양면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투자자들은 지금까지 안전장치로 각광받은 ‘콜앤드래그(call and drag)’의 실효성도 다시 따지는 분위기다. 계약 당시의 예측을 한참 벗어나게 되는 '불운한' 상황에서는 효용성이 크지 않다는 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2011년 두산인프라코어차이나(DICC) 사례를 통해 드래그얼롱이 절대적인 무기가 아니란 점이 확인됐다. 이후 FI 투자 계약에서는 드래그얼롱 조항 관련 항목만 수 페이지에 달할 정도로 만약을 대비한 문구들이 추가되기 시작했다.
다시 ‘풋옵션(미리 정한 가격에 자산을 팔 수 있는 권리)’의 시대가 오는 것 아니냐는 예측도 나온다. 작년 KT는 KT클라우드 프리IPO를 진행하며 투자자에 풋옵션을 줬다. JKL파트너스는 HMM 인수 FI로 참여해 수천억원을 투자할 예정인데, 잠재 LP들은 풋옵션이 포함된 조건을 원하는 분위기로 전해진다.
11번가 사태는 ‘계약’ 그 이상의 문제를 드러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계약’ 자체로는 문제가 없었고, 이후 회사 측의 결정도 납득이 간다는 의견도 있다. 다만 투자업계에선 SK그룹 측이 ‘최후의 카드’를 선택했다는 데 아쉬음을 표하기도 한다.
투자자 입장에선 대기업의 CEO도 신뢰하기 어렵다. 대기업과 일할 때는 '총수의 얼굴'을 믿기 마련이지만, 실상 협상 테이블에 앉는 사람은 CEO 등 경영진이고 그나마도 몇 년마다 바뀐다. 5년짜리 투자에서 3년짜리 CEO가 끝까지 자리를 지킬 가능성이 크지 않다. 사외이사도 투자자의 사정보다는 그 순간 회사의 이익, 그도 아니라면 개인의 안위를 먼저 살필 수밖에 없다. 개별 사안을 일일이 파악하기 어려운 총수는 시끄러워진 뒤에야 관심을 가질까 말까다. 투자자로선 투자 말미에 예측을 벗어나는 불운을 맞이하게 되면 일단 손실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콜옵션을 활용하는 데는 사실상 풋옵션 대용이고 문제가 생기면 대주주인 대기업이 알아서 정리해줄 것이란 믿음이 깔려 있다"며 "그룹 총수는 현안을 모르고 책임을 져야 하는 경영진이나 이사회는 나몰라라 하면 투자자 입장에선 배신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