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토만 하던 대형 M&A 속도 낼까 주목
유의미한 성과 내려면 수십조원 필요해
기업결합 장벽·전략 부재에 난항 우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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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회장이 부당합병·회계부정 관련 재판 1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음에 따라 삼성전자가 본격적인 확장 행보에 나설지 관심이 모인다. 사실상 최종 의사 결정자인 총수가 돌아온 만큼 지금까지 공염불에 그쳤던 대형 M&A가 속도를 낼 것이란 기대도 고개를 들고 있다.
삼성전자의 의지를 떠나 현실적인 벽은 낮지 않아 보인다. 이재용 회장이 오래 발목이 잡힌 사이 글로벌 M&A 시장의 경쟁 강도는 극도로 심해졌다. 보수적인 행보로 M&A 경험까지 퇴보한 상황에서 경쟁자와 시장을 놀라게 할 대형 거래를 추진하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5일 법원은 이재용 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관련한 부당합병·회계부정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이 회장을 기소한 지 3년여 만의 1심 판결이다. 앞으로 검찰 항고에 따른 장기전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지만 일단 이 회장이 경영 활동을 수행하는 데 큰 제약이 사라진 셈이다.
최근 삼성그룹을 둘러싼 기류는 차갑지 않다. 이 회장의 1심 선고가 지난 1월말에서 이날로 미뤄진 사이 삼성물산의 강화된 주주환원책이 발표됐다. 마침 정부도 저평가받는 국내 증시를 부양하기 위한 정책을 내놨다. 미묘한 시기에 정부와 삼성그룹이 한 방향을 보는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에 ‘대형 M&A’가 얹어지면 삼성전자와 시장, 정부 모두에 화룡점정이 될 수 있다.
그간 삼성전자가 M&A를 준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사업지원TF 등을 중심으로 이재용 회장이 돌아와서 결심만 하면 바로 추진할 수 있도록 여러 선택지를 마련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아직 빛을 발하지 못했지만 3년 내 대형 M&A 발언(2021년, 최윤호 당시 CFO 사장)이나, 한종희 부회장이 매년 내놓은 청사진 등에서 이런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한 M&A 업계 관계자는 “이재용 회장의 재판 결과만 나오면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삼성전자 내부적으로 주요 후보 거래에 대한 파악을 마쳤을 것”이라고 말했다.
총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지는 어느 때보다 충만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대형 M&A 성과를 낙관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여전하다.
일단 무엇을 사야 하느냐부터 고민이다. 4~5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가 가장 먼저 볼만한 기업으로는 차량용 반도체 분야가 첫 손으로 꼽혔다. 한참 부상하던 영역이었고 NXP, 인피니언 등 주요 기업들에 대한 스터디도 마쳤던 것으로 전해진다. 삼성전자 사상 최대 M&A인 전장기업 하만과의 시너지 효과도 기대됐다. 결국 총수 부재라는 현실의 벽은 넘지 못했다.
삼성전자가 주춤하는 사이 경쟁력이 약화하거나 새로 보강해야 할 영역은 늘어났다. 바이오, 인공지능(AI), 전장사업, 로봇, 시스템반도체 등 신경써야 할 곳이 적지 않다. 작년말 정기인사를 통해 출범한 ‘미래사업기획단’에서 이런 구상을 구체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가 각 영역에서 경쟁자들을 따라잡으려면 대형 M&A 외에 별다른 수가 없는데 어느 하나 쉽지 않은 형국이다. 몇 년을 허비한 사이 하만 정도의 거래로는 분위기 반전을 꾀하기 어려운 처지가 됐다. 웬만한 거래는 수십조원을 들여야 하는데, 사업 부진이 이어지며 삼성전자의 현금 창고도 비어가는 상황이다. 당장 반도체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한 설비 투자 부담도 만만치 않다. 거래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쇼핑 리스트를 갖췄다 한들 혼자 성과를 낼 수 없다.
글로벌 M&A 시장에선 반독점 경향이 점차 강화하고 있다. IT, 반도체 등 미래 산업은 특히나 경쟁당국의 심사가 빡빡하다.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 인수, 인텔의 이스라엘 파운드리 타워세미컨덕터, 아마존의 로봇청소기 업체 아이로봇 인수 등 수조~수십조원 거래가 각국 기업결합 심사를 넘지 못해 좌초했다. 반도체나 모바일 등 삼성전자의 영향력이 강한 영역에선 대형 거래가 나오기 어렵다는 것이다.
삼성의 바이오 사업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 관련 재판에서도 핵심 쟁점 중 하나였다. 검찰은 이재용 회장이 자신의 지분이 많은 제일모직 산하 바이오 사업을 승계를 위한 소재로 썼다는 점을 문제삼아 왔다. 삼성이 M&A 등으로 바이오 사업의 성과를 입증하면 ‘원래 성장 잠재력 있는 좋은 회사’였다는 인식을 주는 데 도움이 될 것이란 시선도 있었다. 바이오 분야 M&A를 꾸준히 검토해 온 것으로 전해진다.
바이오 M&A도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의 고민을 안고 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있는 바이오 기업을 인수하는 데도 수십조원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물산, 삼성전자까지 거슬러 가서 대규모 자금을 끌어와야 하는 부담도 있다. 판매망을 강화하기 위해 바이오젠의 사업부 인수에 나섰지만 지금까진 쟁자를 자금력에서 앞지르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형 M&A면 기업결합 심사 역시 통과하기 쉽지 않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바이오시밀러 기업을 또 사들인다면 ‘고객과 경쟁하는’ 구도가 또 만들어진다는 부담이 생긴다.
삼성전자 내부의 문제도 고민이다. 이재용 회장이 하만 인수를 이끈 이래 대형 M&A는 자취를 감췄다. 수천억원 규모 투자나 해외 법인의 소형 M&A 정도가 대부분이었다. ‘변화보다 안정’ 기조에 돈을 쓰는 것보다 곳간을 지키는 데 능한 경영진이 오래 자리를 지키는 형국이다. 대형 M&A는 진행하지 않았는데 배당 등 주주환원에 힘을 쏟았던 것도 아니다. M&A를 수행해본 경험과 인력들도 많이 흩어진 상황이라 실제 대형 거래를 실행할 역량이 충분한지 의문이다.
다른 M&A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AI나 테크, 반도체, 바이오 등 영역에서 의미있는 기업을 인수하려면 대부분 수십조원은 투입해야 하고 독과점 장벽도 낮지 않다”며 “재판 이후 대형 거래 소식을 알리려는 생각은 있겠지만 단독 협상이든 경쟁 입찰이든 가까운 시일 안에 성과를 내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