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호재였던 美 IRA 보조금…韓 2차전지 산업 향한 청구서로 둔갑
입력 2024.02.06 07:00
    美 차관 "IRA는 우려국 제외 공급망 재편이 취지"
    韓 기업용 재원 아니란 설명…FEOC 당위 재확인
    美 완성차 업체 '공유' 요구…GM, 75% 요구할 듯
    보조금 기대감에서 전방위 청구서로…조정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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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1년 전만 하더라도 국내 2차전지 기업에 투자할 이유로 꼽힌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보조금이 이제는 산업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투자비 부담이 본격화한 지난 1년 2차전지 기업의 떨어지는 마진을 보완하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해줬지만 올 들어 전방위 청구서가 날아들기 시작한 탓이다. 미국 정부는 IRA가 한국 기업을 위한 재원이 아니라 선을 긋고, 한국 2차전지 기업들도 명확한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일 한미 고위급 경제협의회(SED) 참석차 방한한 호세 페르난데스 미국 국무부 경제차관은 IRA의 취지는 한두 국가에 원자재 공급망을 의존하는 위험 해소에 있고, 공급망 다변화를 위한 해외우려국(FEOC) 세부 규정의 당위가 충분하단 입장을 밝혔다. FEOC 규정에 대한 한국 측 우려를 이해하고 고려하겠지만 IRA를 국내 2차전지 기업용 재원으로 바라보는 시각에 선을 그은 것으로 풀이된다. 

      배터리 업계에선 청구서가 날아오기 시작했다는 분위기가 전해진다. 

      미국은 작년부터 IRA에 따라 첨단제조 세액공제(AMPC) 보조금을 지급해 왔다. 북미 지역에 직접 진출한 2차전지 기업에 대한 현금성 수혜 조항이니 관련 투자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국내 2차전지 기업엔 호재로 통했다. 실제로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지난해 AMPC 보조금을 장부에 반영하며 투자비 증가와 판가 하락으로 꺾이기 시작한 수익성을 일부나마 메울 수 있었다. SK온은 지지부진하던 투자자 유치 과정에서 보조금 기대감 덕을 크게 보기도 했다. 

      당시 업계 내에선 IRA 보조금을 마치 미국 정부가 국내 2차전지 기업을 위해 돈을 살포하는 식으로 해석하는 데 대한 경계가 적지 않았다. 조 바이든 행정부가 중국, 러시아 등을 제외하고 공급망을 재편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법인 만큼 수혜 요건에 대한 세부 지침을 계속 내놓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난 연말 미 에너지부(DOE)가 FEOC 세부 규정을 내놓자 이 같은 우려는 현실이 됐다. 

      FEOC는 중국, 북한, 러시아, 이란 등 미국 입장에서 우려국 정부가 지배력을 행사하는 기업과 공급망을 구축하면 보조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게 골자다. 배터리 부품은 올해부터, 핵심광물은 내년부터 FEOC에서 조달할 경우 보조금을 받을 수 없다. 지배력에 대한 기준이나 핵심광물 조달 경로 추적 등에 대한 혼란이 있지만 큰 틀에서 '중국을 빼고' 공급망을 구축하란 미국 입장은 명확해지고 있다.

      투자 업계 한 관계자는 "최근 2차전지 기업 실적 발표회를 전후해 FEOC 관련 문의가 커지고 있는데 보조금 수혜 논리가 기업 실적의 가시성을 오히려 해치는 상황"이라며 "국내 기업 대부분이 주요 원재료 확보 과정에서 중국과 합작사를 꾸린 터라 보조금 수령을 위해 지분율을 조정하고 공급망을 대체하는 과정에서 지출할 비용이 얼마나 들어갈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조금을 지불하는 미국 정부뿐 아니라 고객사인 현지 완성차 업체의 입장도 변화하고 있다. 

      미국 GM은 현재 LG엔솔과 운영 중인 배터리셀 생산 합작법인(JV)에서 수령하는 AMPC의 절반 이상을 요구하고 있다. 작년부터 전기차 가격 인하 경쟁이 치열해지는 터라 완성차 업체와 국내 2차전지 기업 간 보조금 공유 가능성이 거론되긴 했으나 GM이 양사 합작법인 지분율 이상의 몫을 주장하고 있다는 얘기다. GM 측은 현재 LG엔솔이 수령하는 보조금의 75%를 원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배터리 업계 한 관계자는 "GM과의 북미 JV 지분이 5대5이지만 LG엔솔 몫 절반을 덜어내 AMPC를 75:25 비율로 공유하자는 입장"이라며 "양사 협상 결과가 나와봐야 알겠지만 LG엔솔 측에서도 대응 논리를 마련하기 곤란한 상황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국내 2차전지 기업 중 가장 많은 고객사와 시장 점유율을 보유한 맏형 격 LG엔솔이 고객사에 보조금을 양보할 경우 유사한 협상이 업계 전반으로 확산할 수 있다는 평이다. 이미 GM을 제외한 나머지 미국 완성차 업체도 전기차 판매 계획이 차질을 빚으며 2차전지 공급사 전반 실적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LG엔솔은 최근 작년 실적에서 AMPC 보조금을 빼고 성과급을 산정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성과급 산정에서 보조금을 빼야 한다면 투자자 입장에서도 보조금을 제외한 실적으로 2차전지 산업을 바라봐야 하는 것 아니냐는 반문도 나온다. 최근 2차전지 업체의 실적 발표에서 IRA 보조금 관련 투자자 문의가 집중되고, 명확한 답변이 이뤄지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시장에서도 국내 2차전지 기업 가치에 대한 눈높이를 다시금 낮춰잡기 시작했다. 계속되는 판가 하락 및 전기차 수요 부진에 더해 사실상 전방 시장처럼 기능해 온 IRA 보조금이 불확실해진 만큼 향후 실적을 가늠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늘고 있어서다. 

      관련 업계에선 LG엔솔, SK온, 삼성SDI 등 셀 공급사를 시작으로 완성차 업체와의 3기 이후 JV 계획이 무산을 앞둔 것으로 파악 중이다. 각사 수백조원에 달하던 수주가 줄어들면 뒷단 핵심 소재부터 핵심광물까지 실적 전망이 모두 틀어질 가능성이 높다. 큰 틀에서 전기차로의 전환이 유지된다고 보는 측에서도 국내 2차전지 기업 전반이 몸값의 상당 부분을 내놔야 할 것이란 우려를 드러내고 있다.  

      증권사 2차전지 담당 한 연구원은 "IRA 보조금을 지급하는 미국 정부부터 현지 고객사가 청구서를 들이미는 만큼 국내 증시에서 2차전지 기업에 투자한 자금도 빠져나가는 수순"이라며 "기업 가치 평가 기준은 올해 내도록 조정을 거칠 전망"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