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관 '묻지마 주문'에 올해 10개 중 5개 20%↑ 공모가
암묵적 '20% 룰'도 깨져…주관사는 수수료 늘어 '방긋'
장기적으론 주관사에 악재…"하우스별 역량 차 없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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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연초 신규 상장한 공모주의 '따블'·'따따블'이 기정사실화되는 장세가 이어지면서, 물량 확보를 위한 기관투자자들의 수요예측 경쟁이 격화하고 있다. IPO 시장에서 암묵적으로 지켜져오던 20% 룰'도 깨져버린 모양새다.
지나친 공모가 상향 조정을 막기 위해 그간 수요예측이 흥행하더라도 '공모희망가 밴드 최상단 대비 20% 이하'로 최종 공모가 확정을 조절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올해 들어 잇따라 이 '금기'가 깨지고 있는 것이다. 과도한 수요예측 흥행과 이에 따른 공모가 상향 확정으로 인해 부작용이 우려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14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올해 첫 유가증권시장 상장을 준비하는 뷰티 테크 기업 에이피알의 공모가는 제시한 희망 공모가 밴드의 상단을 25% 초과한 25만원으로 결정됐다. 에이피알은 앞서 지난 2일부터 8일까지 기관투자자를 대상으로 수요예측을 실시했는데, 전체 1969건의 주문 중 97%가 넘는 1913건이 밴드 상단을 초과해 주문을 넣은 것으로 나타났다.
통상 공모가는 상장사와 주관사 간의 협의를 통해 적정 공모가를 산출한 후, 기관투자자의 수요예측 결과에 따라 최종 결정된다. 상장사는 적정 공모가를 밴드 형태로 제시하는데, 이때 밴드 최상단 금액은 상단 10%~하단 30% 등 평균적으로 20%의 할인율을 적용한다.
이에 업계에서는 최종 공모가를 밴드 최상단 기준 20% 안쪽에서 결정하는 소위 '20% 룰'을 암묵적으로 따라왔다. 이 이상 공모가를 높인다면, 주관사가 산정한 할인 전 '공정가치'가 아무 의미 없는 숫자라는 걸 자인하는 셈인 까닭이다.
실제로 에이피알의 공정가치는 주당 24만6237원이었다. 에이피알은 여기에 18~40%의 할인율을 적용해 14만7000~20만원의 공모희망가 밴드를 산정했다. 25만원의 확정 공모가는 이렇게 산정한 공정가액보다도 높은 수준이다. '공모주 할인'은커녕 '프리미엄'이 붙어버린 셈이다.
이처럼 최근 공모주 열풍으로 물량을 하나라도 더 받으려는 운용사 등 기관투자자들이 경쟁적으로 수요예측에서 가격을 높게 써내면서, 이같은 '20% 룰'이 깨지는 사례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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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기상장사 포함, 현재까지 수요예측을 통해 공모가가 결정된 10개 기업이 모두 공모 희망가 상단을 초과해 공모가가 결정됐고, 이 가운데 상단 20% 이상 수준에서 결정된 곳은 5곳에 달한다. 이닉스의 경우 상단인 1만1000원에서 27.3% 높은 1만4000원에서 공모가가 결정됐다.
문제는 높은 공모가가 상장 후 주가를 뒷받침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수요예측 흥행에도 불구, 상장일을 제외하고 공모주 주가는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838대 1로 높은 수요예측 경쟁률을 기록하며 3400원에 공모가가 결정된 HB인베스트먼트는 상장일 한때 1만1400원(235%)까지 급등했으나, 현재는 상승분을 대부분 반납하고 공모가 수준인 3670원에 거래되고 있다.
공모주 열풍에 주관사가 환매청구권(풋백옵션)을 부여한 기업들까지 공모가가 높게 형성되는 경우도 있다. 이에이트의 상장 주관사인 한화투자증권은 흥행을 위해 3개월 이내 주가가 공모가를 밑돌면 투자자가 공모가의 90% 수준에서 주관사에 주식을 되팔 수 있는 풋백옵션을 부여했다.
한화투자증권 입장에선 이에이트가 자본잠식 기업인 동시에 오버행 우려까지 겹쳐 흥행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지만, 공모주 열풍에 힘입어 희망 공모가(1만8500원)을 웃도는 2만원에 공모가를 결정했다. 주관사 입장에선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도, 지금의 시장에선 3개월 이내 공모가가 1만8000원 아래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에 배팅한 셈이다.
주관사 입장에선 공모가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수수료를 많이 챙길 수 있는 구조라 최근의 시장 분위기를 내심 반기면서도, 한편으론 이러한 분위기가 장기화하는 것에 대해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 증권사 IPO담당 고위 관계자는 "지금은 주관사가 밸류에이션 산정을 위해 노력한 것이 무색할만큼 기관투자자들이 수요예측 과정에서 높은 가격을 써내고 있는데, 그 근거가 없다"며 "단기적으론 주관사 입장에서 좋을 수 있겠지만, 장기화하면 밸류에이션 산정에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고 하우스간 역량도 흐려져 마냥 좋지만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