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회사채 예상 발행량 60조…1분기만 27조 넘겨
총선 앞둔 기업들은 불안감에 “일단 현금부터 마련”
주관 경쟁 심해진 증권가…눈도장 찍으려 을(乙) 자처
발행사는 경쟁 부추겨…'거래 트려면 성의 보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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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채 시장이 갈수록 혼탁해지고 있다. 캡티브 영업이 판을 치면서 가격 왜곡 현상이 심해진다는 아우성이 나오고 있다. 총선효과로 1분기 채권 시장이 활황을 기록한 가운데 각 증권사가 정통 투자은행(IB)에서 실적 부진을 메우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발행사는 되도록 저렴한 가격에 채권을 발행하려는 니즈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이용하는 양상을 보인다.
인베스트조선이 집계한 2023년 1분기 채권자본시장(DCM) 리그테이블에 따르면 증권사가 주관을 맡은 무보증 공모회사채(일괄신고 제외)는 약27조6995억원으로 나타났다. 전년 동기 대비 30% 가량 증가한 것으로 지난해 발행된 회사채 물량(55조원)의 절반 수준이다.
연초에는 기관투자자들이 채권을 적극적으로 사들이기 때문에 통상 발행량이 많지만 올해 1분기에는 총선효과 등에 힘입어 회사채 발행이 유독 많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특히 1월에는 기업 4~5곳이 같은 날 수요예측을 진행하는 소위 '빅데이'가 연이어 발생했다.
오는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최대한 자금을 확보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컸다. 기업들 사이에선 총선 이후 정세가 어떻게 흘러갈지 불확실한 상황에서 유동성을 확보할 필요성이 크다는 의견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연초에 조달을 앞당긴 일부 기업 CFO들이 오너로부터 칭찬을 받은 사례가 업계서 회자될 정도다.
LG에너지솔루션·LG화학 등 조단위 채권 발행으로 1분기 회사채 시장은 활기를 띠었다. LG에너지솔루션은 5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진행한 수요예측에서 5조6000억원의 뭉칫돈을 받아내 발행 규모를 1조6000억원까지 확대했다. 회사채 단일 발행 기준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주관 지위를 얻기 위한 증권사간 수임 경쟁은 격화되고 있다. 증권사 실적에 크게 기여하던 부동산금융이 부진하자, 각 증권사가 DCM 등 정통 커버리지 영역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기존의 증권사 주관 순위가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일부 증권사가 전력 보강 등을 통해 매섭게 치고 올라오는 모습이다.
KB증권과 NH투자증권의 양강 구도가 굳건한 가운데 한국투자증권이 만년 3위를 벗어나기 위해서 주관 경쟁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으로 알려진다. 한국투자증권(4조7000억원)과 NH투자증권(5조원)의 올해 1분기 전체 회사채 주관 규모는 3000억원 차이로 뒤집기가 수준이다.
중위권 경쟁은 더욱 치열하다. 회사채 시장의 신흥 강자인 신한투자증권은 전년도 4위인 SK증권을 제치고 올라섰다. SK증권은 전체 회사채 주관 순위에서 한국투자증권과 꾸준히 3, 4위권을 유지했는데 이번에 5위로 떨어진 것이다. 신한투자증권과 전체 주관 규모가 불과 2000억~3000억원 차이에 불과해, 접전을 기록 중이다.
회사채 시장은 원래도 발행사 우위지만, 최근 증권사들의 주관 경쟁은 누가 '슈퍼을(乙)'인지 경쟁하는 것에 가깝다는 평가가 나온다. 주관 업무를 수임하기 위해 계열사를 동원해 발행 금리를 낮추는, 캡티브 영업을 내세우고 있다.
지난 3월 진행된 LG화학 2년물 수요예측에선 한국투자증권이 타부서를 동원해 채권 발행금리를 낮췄다는 의혹이 나왔다. 채권 트레이딩부서와 리테일 부서등이 입찰에서 대체로 금리 하단에 자금을 베팅해 금리를 끌어내렸다는 것이다. 연초에 진행됐던 호텔롯데, 롯데쇼핑 회사채 수요예측에서도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중론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10~20년간 발행사들과 좋은 관계를 쌓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이를 바탕으로 영업을 해왔다. 그런데 일부 증권사가 캡티브 영업까지 동원해 주관 업무를 수임하면서 시장이 과열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부 발행사는 이런 경쟁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며 증권사에 노골적인 금리 인하 요구를 하고 있다고 알려진다. 업계 관계자들은 발행사 측에서 '새롭게 거래 관계를 쌓으려면 캡티브 영업 등을 통해 성의를 보여라(?)'라는 식의 의사표현이 적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캡티브 영업 의혹이 제기됐던 주요 대기업 중 상당수는 이런 비판에서 면하기 힘들 것이란 관측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일부 발행사 재무팀은 채권 금리를 낮출 수 있게 해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하기도 한다. 우호적인 관계를 위해선 계열사를 동원해서라도 금리를 낮춰달라고 암시하는 것"이라며 "채권시장 신규 진입 비용을 내라는 식이다"라고 말했다.
증권사와 발행사 간 갑을 관계에서 투자자의 이익은 점차 소외되고 있다. 금리 수준이 의도적으로 낮춰지면서 원하는 가격에 채권을 매입하기 더욱 어려워졌다는 원성이다. 지난해 NH투자증권은 GS건설 회사채 금리를 내리기 위해 일부 기관투자자들의 수요를 배제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증권사 커버리지 관련 부서는 기관투자자들에게 채권을 사라고 영업을 하는데, 캡티브 영업을 하게 되는 순간 그들의 이익과 반대로 행동하는 것과 같다. 캡티브 영업은 직업 윤리에 비춰봐도 바람직하지 않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