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ㆍ금융 등 수혜 기대...반도체 등 기술주 급락
6월 美 CPI 발표 이후 물가→경기로 시장 관심 바뀌어
녹록지 않은 경기 상황에 내년 수익성 의문...순환매 수요 촉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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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총탄 한 발이 글로벌 증시의 흐름을 바꿨다. '트럼프 트레이드'라고 명명된 이 현상은 인공지능(AI)기술주에 쏠렸던 자금이 중소형ㆍ산업주로 옮겨가는 '대규모 순환매'를 촉발시켰다. 2분기 실적 시즌이 끝나는 8월 이후에야 증시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전망됐던 '미국 대선 변수'가 두 달 일찍 현실화하며, 대비하지 못한 시장의 혼란이 극에 달했다는 평가다.
'트럼프 트레이드'는 명분일 뿐, 실제 시장이 우려하고 있는 건 내년에 본격화할 '경기 침체'라는 분석도 나온다. 조만간 단행될 기준금리 인하가 경기 연착륙 후 호황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단, 경기 침체를 늦추기 위한 예방적 목적일 가능성에 힘이 실리면서다.
지난 7월 13일, 미국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유세 중이던 미국 공화당 소속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선거 후보가 피격당했다. 총격범의 총탄은 불과 1mm의 차이로 귀를 스쳤고, 천운으로 살아난 트럼프 후보는 펄럭이는 성조기 아래 주먹을 불끈 치켜들었다. 지난달 말 TV토론 이후 상승세를 탄 트럼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은 이 사건 이후 급등했다.
이후 미국 다우 지수는 4만210포인트를 돌파하며 사상 최고를 기록했고, 중소형 산업주 중심의 러셀2000 지수는 4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8% 넘는 상승폭을 기록했다. 에너지와 금융 업종의 강세가 뚜렷했는데, 이는 트럼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아짐에 따라 정책 수혜가 예상되는 업종이 강세를 보이는 '트럼프 트레이드' 현상 때문이었다.
반면 엔비디아를 필두로 기술주 매도가 쏟아져나오며 이후 일주일간 나스닥100 지수는 4% 가까운 하락세를 보였다. 반도체주는 물론, 이차전지 등 대형주들이 직격탄을 맞은 국내 코스피 지수 역시 주간 하락률이 3.3%에 달했다. 특히 올해 지수 상승세를 이끌었던 반도체가 5거래일간 6.7% 하락하며 '하락 체감도'를 키웠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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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장의 흐름은 이전과는 다르게 바뀌고 있었다. 지난 11일 발표된 미국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시장 전망치를 크게 하회했다. 전년동월 대비 3% 상승하며 3년만에 가장 낮은 수준을 기록한 것이다. 특히 전월대비로는 마이너스(-) 0.1%를 기록해 4년만에 처음 물가가 전월 대비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6월 CPI 발표 이후 물가 안정에 대한 확신이 커지며 시장은 시선은 '인플레이션에 대한 불안감'에서 '경기 모멘텀'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와중에 현 바이든 정권의 정책을 전면 수정하겠다는 트럼프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급등하며 예측할 수 없는 변수로 등장했고, 리스크 오프(risk-off;위험자산 축소) 심리를 자극하며 변동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이달 초까지만 해도 2분기 실적시즌을 모두 소화하고, 8월말부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등 정치 이벤트를 거치며 서서히 대선 국면에 접어들 것으로 봤다"며 "6월 CPI 발표 이후 '인플레이션 트레이딩은 끝났고, 다음은 뭐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갑자기 트럼프 당선 가능성이 부각하며 이를 급격히 가격에 반영하느라 변동성이 커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트레이드'는 당분간 증시는 물론, 국내 금융시장에 상당한 영향을 줄 전망이다. 출범 가능성이 커진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체성은 미국우선주의ㆍ고립주의ㆍ보수주의로 요약된다. 감세와 금리인하를 통해 경기를 부양하고, 이와 동시에 관세를 통해 자국 산업을 보호할 가능성이 부각하고 있다.
하이투자증권에 따르면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정책과 보조금 축소는 반도체ㆍ이차전지ㆍ자동차 등 한국의 주력 산업에 피해를 줄 우려가 제기된다. 이차전지는 이미 업황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전기차 보조금 축소를 피하기 어려워 보이고, 반도체 역시 반도체 과학법이나 칩4 동맹 정책의 후퇴가 우려된다는 것이다. 2017년 반도체 강세 싸이클을 무너뜨린 게 트럼프의 대중 관세 부과였다는 사실도 다시 회자된다.
방산ㆍ조선ㆍ기계 등은 수혜 가능성이 있는 산업군으로 꼽힌다. 트럼프 당선시 유럽에 대한 미국의 방위금 분담 요구는 방산수출기회 확대로 이어질 수 있고, 조선과 기계 역시 중국에 대한 견제 과정에서 수혜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종식과 재건 사업은 국내 건설주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 증권사 트레이더는 "23일 코스피200에서 연중 신저가 종목이 23개나 나왔는데 이 중 상당수가 이차전지 관련주였고, 신고가 종목 중엔 기계ㆍ조선ㆍ건설업종이 많았다"며 "상반기 내내 반도체 등 AI 기술주가 올랐기 때문에 피로감이 쌓인 상황에서 '트럼프 트레이드'가 수익 실현의 스위치가 된 것 같다" 평가했다.
'트럼프 트레이드'의 수명은 짧게는 오는 8월말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부터 길게는 오는 11월 대선 결과 확정까지로 추정된다. 이후엔 결국 경기의 방향성과 그에 따른 기업의 수익성이 시장의 향방을 가를 핵심 요소로 작용할 거란 전망이 나온다.
문제는 냉각기에 접어든 미국 경기가 과연 침체의 늪을 피해 무사히 연착륙에 성공할 수 있을지다. 사실상 완전고용 상태를 유지하던 미국 실업률은 현재 4.1%로 상승세를 띄고 있으며, 주간 실업청구건수 역시 지난 5월 이후 증가일로다. 7월 미시간대소비자심리 예비치 및 향후 경기 기대 등 경기에 선행하는 지표들은 모두 연초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다.
현재 미국 선물 시장에 반영된 9월 미국 기준금리 인하 확률은 90%를 웃돌고 있다. 지난달까지만 해도 올해 미국 기준금리 인하는 9월 한 차례 정도로 예상됐지만, 지금은 9월ㆍ12월 두 차례는 기본이고 11월까지 포함해 3연속 인하 가능성까지 대두하고 있는 상황이다.
유안타증권은 "당장 경기 침체 국면으로 전환될 가능성은 발견되지 않지만, 미국 경기의 흐름과 전망은 분명 이전과 같지 않다"며 "만약 3분기 경기 하강이 빠르게 발생한다면 연준도 단발성 금리인하 보다는 연속적인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내다봤다.
국내 경제 상황 역시 녹록지 않다는 평가다. 지난 5월 국내 생산과 소비, 설비투자는 모두 전월대비 감소하며 내수 부진이 심화하고 있음을 가리켰다. 취업자수는 2021년 3월 이후 최소 수준으로 줄어들었고, 내수기업의 기업경기실사지수(BSI) 전망치 역시 연초 이후 하락세를 지속하고 있다. 부동산 가격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한국은행은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확인 후 오는 10~11월에서야 기준금리 인하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한 증권사 연구원은 "이익 지표 둔화 조짐이 곳곳에서 보이는 가운데, 바이든 정부의 정책 기조 하에서 계산한 내년 EPS(주당 순익) 추정치가 정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 같다"며 "'트럼프 트레이드'란 결국 보수적인 전망 아래에서 이제는 비싸진 자산을 팔고,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정책 수혜까지 기대되는 자산으로 갈아타려는 수요가 촉발한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