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인사·CEO 교체되면 다시 제출해야
'떠날 사람이 책임 정한다' 비판 우려도
국감 앞두고 괜히 '타깃' 될라…'눈치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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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무구조도 제출 시기를 두고 서로 눈치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CEO 연임 여부도 불투명하고, 연말 인사가 있으면 어차피 다시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는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10월에는 국감도 있어, 이 이슈가 내년으로 넘어갔으면 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
'금융판 중대재해처벌법'이라고 불리는 책무구조도 시행을 앞두고, 은행들의 고심이 깊어지고 있다. 내년 1월부터 제도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데, 금융당국이 오는 10월까지 책무구조도 조기 제출을 압박하는 탓이다. 제출 시기를 두고 은행들의 셈법이 복잡해졌단 평가다.
금융당국은 조기 제출하는 시범 운영 기간에는 금융사고나 관리의무 위반 등이 발생해도 제재하지 않겠다는 인센티브를 내걸었다. 다만 은행들은 조기제출 하더라도 제도가 실제 시행되기까지 여유가 2개월 남짓해 인센티브 유인이 크지 않다는 반응이다. 주요 시중은행장들의 임기도 올해가 마지막인데, 연임에 실패할 경우 이사회를 거쳐 책무구조도를 다시 제출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존재한다.
1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들은 현재 법무법인에 책무구조도와 관련한 마무리 법률 검토를 받고 있다. 조만간 책무구조도 작성이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지만, 제출 시기와 관련해선 확정된 바가 없다는 입장이다. 연초까지만 하더라도 올해 안으로 책무구조도를 제출한다는 방침이었지만, 최근 연내 제출에 부담감을 느끼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연말 조직 개편에 있다. 통상 은행들은 연말에 대대적인 조직 개편과 인사 이동을 시행한다. 이때 특정 내부통제를 책임지는 임직원이 바뀌거나, 임직원의 직책이 바뀌면 책무구조도를 다시 작성해야 한다. 10월에 책무구조도를 조기 제출하더라도, 연말 인사이동에 맞춰 다시 제출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단 설명이다.
더구나 올해는 주요 은행들의 CEO격인 은행장들의 임기 만료가 예정돼있다. 실제로 5대 시중은행인 KB국민은행(이재근), 신한은행(정상혁), 하나은행(이승열), 우리은행(조병규), NH농협은행(이석용)의 은행장들이 모두 올해를 끝으로 임기가 만료된다. 책무구조도를 조기 제출한 상황에서 연임에 실패할 경우, 떠날 사람이 책임을 정해놓고 간다는 비판에 직면할 가능성도 있다.
이사회 의결도 부담이다. 책무구조도는 이사회 의결을 거쳐야 금융당국에 제출할 수 있는데, 이사회를 한 번 소집하는 데 적지않은 공수가 든다는 설명이다. 이에 은행권에서는 최근 조기 제출 인센티브로 이사회 의결을 생략하는 방안도 건의했지만, 금융당국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입장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조기 제출 인센티브가 충분한 '유인책'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시각도 있다. 인센티브의 주요 내용은 조기 제출 금융사에 대해 컨설팅을 제공하고, 시범 운영 기간에 금융사고나 관리의무 위반 등이 발생하더라도 제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년 1월 초 시행 시기를 고려하면 2개월 남짓한 시간이다. 충분한 컨설팅이 제공되기에는 짧은 시간이다. 2개월짜리 '면책특권'이 큰 의미를 지닌다고 보기도 힘들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내부에서는 벌써부터 올 연말 인사이동이 꽤 크게 있을 거란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조기에 제출하더라도 또 다시 새로운 책무구조도를 제출해야하는 번거로움이 있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이 제시한 제출 시기가 국정감사 기간과 겹친다는 점도 은행에는 부담요소다. 아직 올해 국정감사 일정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통상 국정감사는 10월 중 진행된다. 국감 기간과 맞물려 책무구조도를 제출할 경우, 국감에서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현재 금융권에서는 신한은행이 가장 먼저 책무구조도를 제출할 것으로 보고 있다. 진옥동 신한금융 회장은 지난해 금융지주 회장들 중 유일하게 책무구조도 조기 도입 의사를 피력한 바 있다. 올 초에는 정상혁 신한은행장이 그룹 계열사 중 가장 먼저 7월 중 책무구조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만 신한은행 내부에서도 책무구조도 도입 시점을 두고 고심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금융당국이 제시한 조기 제출 기한 마지노선인 10월 31일 전까지 은행들간의 눈치싸움이 이어질 것이란 관측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누가 먼저 스타트를 끊느냐가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며 "어느 한 곳이라도 조기에 제출하는 곳이 생기면, 다른 은행들도 당국에 책잡히지 않기 위해 따라서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