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테마 업고 상장한 기업들 주가 지지부진
높아진 당국 허들 등 벤처 IPO 점점 어려워
지난 유동성 장세에 부풀려진 몸값도 부담
-
- 이미지 크게보기
- (그래픽=윤수민 기자)
올해 인공지능(AI) 테마에 힘을 얻어 기업공개(IPO)를 한 벤처 기업들의 주가가 심상치 않다. 증시에 입성한 상장 첫날부터 공모가를 하회한 일도 적지 않다. 2차전치 이후 주목받은 AI마저 회의론이 떠오르면서 사실상 투자자들의 IPO를 통한 회수에 대한 기대감이 옅어졌다.
너무 높은 기업가치를 인정받은 벤처기업들은 미국 증시 상장도 노리지만 해외 상장도 쉽지 않다 보니 투자자들의 기대감은 별반 다르지 않은 분위기다.
지난 6월 25일 코스닥 시장에 상장한 에스오에스랩은 자체 AI기반 기술을 활용한 라이다를 생산하는 기업으로 주목받았지만 상장일 2만1100원을 보였던 주가가 현재 5000원 수준으로 떨어졌다. AI 웨어러블 의료기기 진단 솔루션 기업 씨어스테크놀로지는 공모가보다 30% 하락한 종가로 상장 신고식을 치렀다. 2분기에 전년 동기 대비 커진 영업손실을 기록해 투자심리가 더욱 위축됐다.
지난해 IPO 시장에서 화제가 됐던 AI기업들 역시 주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AI기반 치과용 소프트웨어 기업인 레이는 지난해 실적 부진으로 주가가 줄곧 우하향했다. AI 테마가 각광을 받았음에도 성과를 보이지 못한 까닭에 현재 주가는 4분의 1토막 났다. 국내 의료 AI기업 루닛은 지난 9월 13만원까지 올랐던 주가가 최근 3만원대까지 하락했다.
글로벌 시장도 별반 다르지 않다. ‘AI 거품론’까지 떠올랐다. 7월 골드만삭스의 주식 리서치 책임자인 짐 코벨로는 “1990년대 후반 닷컴 버블 현상이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라고 분석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골드만삭스는 AI에 대한 장밋빛 전망을 내놓던 IB하우스 중 하나였다.
막대한 투자가 들어가는 ‘인공지능 모델’이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으면서 회의론이 커졌다. 실제 뉴욕증시에 상장된 글로벌 고객관계관리(CRM) 기업 세일즈포스는 AI 모델 도입에도 매출 성장에 실패하면서 주가가 하락세다. 지난 5월 부진한 1분기 실적 발표 이후에는 주가가 20% 급락했다.
이렇다 보니 국내 기관투자자들의 벤처업계 투자에 대한 시선도 긍정적이지 않고, 벤처 펀딩도 혹한기가 길어지고 있다. 2차전지 이후에는 AI 테마가 ‘그나마’ 기관투자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벤처투자 테마이지만, 이마저도 성과가 좋지 못하다. 올해 초까지 활기를 보인 AI 투자도 생각보다 빠르게 열기가 식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올해 교직원 공제회가 VC 출자 사업을 건너뛰기로 하면서 하반기 주요 공제회 가운데 VC 출자가 예상되는 곳들은 행정공제회, 과학기술인공제회와 노란우산공제회 정도다. 다수의 LP들이 VC 출자를 나서지 않는 이유로는 IPO 등을 통한 투자회수가 요원한 점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한 기관투자자는 “미래 성장성 있는 기업들을 항상 찾고 있긴 하지만 2차전지는 한물갔고 AI가 왔는데, 국내에서 진짜 ‘AI 기업’으로 볼 기업도 마땅히 없다”며 “반도체 부품 등 반도체 기업들이 AI로 묶이는 정도고 정말 경쟁력 있는 기술이 있는 기업은 보기 드물다”고 말했다.
-
VC들조차 투자기업에 대한 ‘상장 대박’에 대한 기대가 옅어졌다. 최근 VC업계에서는 투자 당시 계약서에도 상장과 관련된 조건들을 까다롭게 내걸지 않는 경우도 많아졌다. 통상 과거에는 초기 스타트업이 아닌 이상 ‘몇 년 이내 상장하지 못할 경우’ 등의 조건을 꼼꼼하게 내걸었다. 최근에는 변수가 많아지면서 기업도, 투자자도 상장을 통한 엑시트(회수)를 더욱 장담하기 어려워졌다.
한 법조계 관계자는 “상장 자체가 기업이 성장한다고 무조건 되지도 않고, 스타트업 상장은 더욱 어려워지면서 최근엔 투자 계약서에 ‘상장을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정도로만 담기는 경우가 많다”며 “과거에 비해 확실히 상장 조건이 느슨해졌고, 관련 조항을 아예 안담을 수는 없으니 최소한으로 언급을 한다”라고 말했다
당국 문턱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올해 특히 스타트업이 IPO이 상장 심사에서 제동이 걸리는 사례가 많았다. 올해 27곳이 거래소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자진 철회하거나 미승인 판정을 받았다. 파두·이노그리드 사태 등 IPO 논란이 계속 불거지면서 당국이 심사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과 더불어 2020~2021년 역대급 유동성 장세 속에서 투자를 받은 기업들의 몸값이 지나치게 부풀려진 점도 VC들의 IPO를 통한 회수에 장벽을 높이는 요소다. VC들은 매출 등의 외형에 집중하며 ‘몸집 불리기’ 기업에 집중 투자했고, 유동성 장이 꺼지고 적자를 극복하지 못한 기업들은 시장에서 외면을 받았다. 일부 기업들은 과거 인정받은 조단위 몸값이, 어쩌면 ‘다시 보기 힘든’ 숫자가 되면서 투자자들과 기업의 부담감만 높인 꼴이 됐다.
높아진 당국 허들과 몸값 눈높이에 해외상장으로 눈을 돌리는 기업도 많다. 쿠팡을 시작으로 네이버웹툰 등 미국 증시 입성 성공 사례가 더해지며 유니콘 기업들의 자신감(?)을 더하기도 했다. 야놀자가 미국 나스닥 상장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고 당근, 컬리 등 또한 미국 상장에 관심을 내비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미국 상장은 국내보다 훨씬 ‘시기’를 장담하기 어려워 투자자 입장에서는 회수 계획을 더욱 세우기 어렵다는 시선도 있다.
한 VC업계 관계자는 “올해 상반기 시장에 당근 구주가 돌았을 때 투자 검토를 했지만, 회사 측이 미국 상장 추진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장기 계획을 세우고 있어 투자를 단행하지 않았다”며 “일부 대형VC나 PE들이야 장기 투자가 가능하지만, 비교적 단기간에 성과를 내야 하는 VC들은 기업의 유망도와 별개로 그 정도 기간을 보고 투자하긴 어렵다”라고 말했다.
다른 대형 VC 관계자는 “지난 10년간 VC들이 ‘플랫폼’ 기업들에 투자를 해 소위 ‘대박’을 많이 터트리고 재미를 봤고, 그 시장이 저물면서 이젠 사실상 끝이 났다”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투자할 곳을 생각하면 다들 생각이 비슷하니 결국 AI로 눈길을 돌리는 건데, 또 AI에 투자하려면 차라리 전도유망한 미국 기업에 투자하지 한국에서 AI 투자하면 답이 있나 싶다”며 “펀딩 되는 자금 규모부터 다를뿐더러 AI나 AI반도체 기술로 한국 기업이 글로벌에서 승부를 보는 게 쉽지 않아서 VC들 다수가 긍정적으로만 보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