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즈앤리스백·공모 리츠 등 다양한 유동화 방법 찾아
수요 적은 유휴·지방자산 매각이 관건…자문사 네트워크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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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매크로 환경 악화로 국내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자산운용사간 거래가 급감한 가운데, 대기업들의 존재감이 부각되고 있다. 사옥 매입에 나서며 부동산 큰손으로 떠오른 한편, 자산 매각을 통한 현금 마련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특히 SK·LG 등 대기업들이 신사업 확장에 고삐를 죄면서 투자 재원 마련을 위해 부동산을 활용하는 사례들이 늘어나고 있다.
기업들이 부동산 전략을 바꾸는 배경으로 '산업 포트폴리오 조정 가속화'가 꼽힌다. 다양한 방법으로 부동산을 유동화해 신사업 투자 재원을 마련하려는 곳들이 늘어나고 있다. SK그룹의 경우 2차전지 등 신사업 투자를 위해 비핵심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대대적인 리밸런싱 작업을 진행중이고, 이 중 비핵심 부동산 자산 매각도 포함돼있다. 비핵심 부동산 자산의 범위는 지방 주유소를 비롯해 일부 제조공장 등 다양하다.
글로벌 부동산 컨설팅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의 3분기 투자 시장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 및 분당 권역에서 이뤄진 오피스 거래 10건 중 절반인 5건이 기업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에서 진행됐다. 하나금융 강남사옥, 장교동 한화빌딩, 태영빌딩, 삼성화재 판교사옥, 한샘상암 오피스 등이다. 기업들은 건물을 매각하면서 임차사로 계속 머무르는 매각 후 재임차(세일즈앤리스백)방식을 선택했다.
류인영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기업솔루션팀 상무는 "지난 2년간 금리가 급상승하면서 상업용 부동산 시장에서 기업들의 존재감이 커졌고, 기업 입장에선 산업구조가 변화로 그간 보유하던 전통 자산에 대한 고민이 커졌다”며 "신사업 투자금 마련을 위해 부동산 등 자산을 처분하거나 대출(론)을 일으켜야하는데 고금리로 대출은 부담이 되니 자산 처분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기업들이 부동산 전문 자문사를 찾는 일도 늘어나고 있다. 통상 기업들은 부동산 거래에 있어서는 ‘조용히’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특히 사옥 등 주요 부동산 매각이 시장에 알려지면 ‘자금이 필요하다’는 시그널을 줄 수 있어 신경써야 할 부분이 많다. 사옥 매각 소문이 돌면 임직원들의 동요도 생길 가능성이 있다.
관련 자문사들도 발빠르게 대기업 고객 늘리기에 집중하는 분위기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코리아는 연초 기업 부동산포트폴리오 관리를 위해 기업솔루션팀을 출범시키기도 했다. 해당 팀은 전국 55개 GS칼텍스 직영 주유소 매각 자문, 전국 31개 SK 주유소 매각 자문을 진행했다.
이지열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기업솔루션팀 이사는 "세일즈앤리즈백, 지방자산 매각 등 기업들이 고민하는 범위도 넓어져서 부동산 자문사들도 새로운 먹거리로 보고 뛰어들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 고객을 사로잡기 위한 자문사들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업무 난이도는 쉽지 않다는 평이다. 기업들은 가격에 대한 눈높이가 높은 편이고, 그마저도 ‘오너’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면 거래가 성사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부동산 거래가 주업인 자산운용사들과 달리 ‘하나부터 열까지' 맞춤 서비스를 제공해야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대부분의 대기업발 거래와 같이 한번 물꼬를 틀기 시작하면 후속 딜들을 수임할 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놓치기 어려운 기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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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기업솔루션팀 류인영 상무, 이지열 이사)
단순 매각 아닌 '활용'…리츠 등 유동화 방법 다양해져
대기업의 부동산 거래가 ‘새로운’ 시장은 아니지만, 최근 자본시장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활용 방안이 다양해지면서다. 단순 자산 매입 및 매각이 아니라 유동화 방법이 다양해졌고, 거래 상대방의 범위도 넓어졌다. 사옥, 제조공장 등의 부동산 자산에서 지방 주유소 등 자산 범위도 커졌다.
대기업들의 리츠를 통한 자산유동화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 기존의 제조업 기업들이 부동산 보유를 선호했던 것과 달리 부동산에 현금이 묶이기 보다는 현금유동성을 확보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SK그룹은 이미 리츠를 설립해 서린사옥과 SK하이닉스의 수처리센터 등을 유동화했고, LG그룹도 리츠 설립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진다. 한화생명은 올해 7월 한화그룹 본사인 장교빌딩을 한화리츠에 8000억원에 편입한다고 밝혔다. 한화리츠의 최대주주가 한화생명인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세일즈앤리스백으로, 한화생명이 배당이익 확보를 위해 자산유동화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리츠를 통한 자산유동화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리츠는 규모가 크고 우량한 자산을 주로 담기 때문에, 전반적인 자산효율화 측면에서는 제한적이라는 지적이다. 기업들은 세일즈앤리스백 방식으로 자산 유동화를 하거나 아예 처분(매각)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설명이다.
글로벌 부동산 전략 따라 핵심자산 외 처분 기조
국내 대기업들은 글로벌 기업들과 같이 핵심 자산을 제외하고는 계속 부동산을 줄여나가는 전략을 보일 것이란 관측이다. 상업용 부동산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졌고, 국내보다는 해외 사업을 확장하는 바라는 기조가 뚜렷하다는 해석이다.
류인영 상무는 "글로벌 기업들은 R&D센터 등 핵심적으로 필요한 자산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임차해서 사용하는데, 최근 국내 대기업들도 핵심 자산이 아니라면 유동화를 고려하거나 임차를 선호하는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기업들은 특히 지방 소재 자산에 대한 처분 니즈가 높다고 전해진다. 인구 소멸과 수요 감소로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가 될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커지면서다. 기업들은 대체로 지방에 있는 유휴자산 처분을 가장 원하고 있다. 사업의 방향성이 바뀌면서 필요한 인력도 줄어드는 경우가 많고, 지방 사옥이나 공장을 유지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이 경우 리츠로 담기에도 제한적이어서 자산유동화보다는 매각을 하는게 부담이 적다는 시각이 나온다.
류인영 상무는 "지방의 급격한 인구 감소와 경제활동 위축으로 인한 수요 급감이 불가피한 상황"이라며 "특히 전국적으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기업들은 이러한 미래 전망이 뚜렷한 만큼, 선제적 대응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에서 올해 진행한 SK와 GS 주유소 매각이 이러한 지방자산 처분 트렌드를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주유소는 전국 각지에 산재해 있어 매각이 쉽지 않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해당 지역에서 다수의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 개인자산가들의 매수세가 이어졌단 설명이다.
이지열 이사는 "인구 100만 이상 도시들의 경우 부동산 매입 수요가 충분히 있어 자산가들을 대상으로 한 마케팅에 나서고 있는데, 기존에 주유소를 운영하고 있는 사업자들이 사업 확장을 꾀하고 있고 지방 의원 등 현금이 풍부한 사업자들도 확장을 위한 부동산 매입을 원한다"고 말했다.
헌편 부동산을 매각하는 고객뿐 아니라 부동산 매입에 나서는 기업 고객들도 부동산 자문 시장의 잠재 고객으로 떠올랐다.
현금 여력이 풍부한 일부 기업들은 오히려 최근 부동산 시장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고 있다. 이들은 직접 매입뿐 아니라 펀드를 통한 우회 매입에도 나서고 있다. 넥슨은 대치동 '현대 오토웨이타워'를 매입했는데, 펀드 구조는 그대로 두고 지분만 인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패션기업 F&F는 강남역 인근 마스턴운용의 건물을 인수했고, 한미반도체는 도산대로 건물을 매입했다. 프롭테크 기업 알스퀘어는 GRE와 함께 포스코 소유였던 엔터식스 한양대점을 매입했다. 컴포즈커피를 운영하는 JM커피그룹은 강남구 세로수길에 약 250억원 규모의 부지를 매입해 '제이엠빌딩'을 완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