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수가 자충수로?…정관에 발목 잡히는 기업들
입력 2025.01.02 07:00
    정관에 신주·전환사채 발행 등도 포함
    경영권 유지하기 위해 안전장치 두기도
    아워홈 우선매수권 매각 걸림돌 작용
    오너 위해 마련 황금낙하산 갈등 불씨
    이사수 제한 등 빠져 시끄러워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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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정관(定款)은 기업의 설립과 운영 근거를 담고 있는 문서로 기업 안에서는 헌법과 같은 역할을 한다. 상법 등의 강행규정에 위반하지 않는 한 발기인과 주주 등 관계에서 강한 구속력을 발휘한다. 정관엔 신주와 전환사채 발행 등 내용이 담기기도 하기 때문에 경영권의 강화나 유지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자연히 기업 창업주나 경영진은 정관에 다양한 안전 장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장치들 때문에 의도치 않은 분란과 갈등이 빚어지는 사례도 나오고 있다.

      아워홈은 2017년 '남매의 난' 이후 숱한 사모펀드(PEF)들이 아워홈 인수를 추진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오너일가가 바라는 몸값이 높기도 했지만 정관의 우선매수권 조항도 걸림돌이 됐다. 아워홈 정관은 어느 주주가 주식을 매각할 때는 다른 주주에게 먼저 우선매수권을 행사할 기회를 줘야 한다고 규정한다.

      해당 조항은 오너일가 남매들이 서로 협력해서 경영을 이어가라는 취지였을 수 있지만 실제 효과는 달랐다. 투자자가 아워홈 경영권을 인수하려 해도 일부 주주가 반대하거나 먼저 사겠다 나서면 성사를 장담하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일부 주주가 실제 인수할 자금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매각을 가로막는 장애물 역할만 했다. 협력보다 서로를 견제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최근 한화그룹이 아워홈 인수에 나선 가운데 해당 정관 규정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사다.

      상법에선 원칙적으로 '주식의 양도성'을 인정하되, 정관 규정에 따라 주식의 양도에 관해 이사회의 승인을 받도록 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법 취지상 주주끼리 주식 양도를 일부 제한하는 약정을 한 것도 원칙적으로 유효하다는 판례가 있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정관상 '우선매수권'을 근거로 매각을 막는 건 어려울 것이란 시각이 있다. 이를 회사와 주주의 관계, 아니면 주주간 관계로 봐야할 지 모호하다는 것이다.

      최근 코스닥 상장사 인피니트헬스케어는 임시 주주총회를 열어 정관상 황금낙하산 조항 삭제 안을 승인했다. 정관에 황금낙하산 조항을 넣는 것도, 정관을 변경해 이를 삭제하는 것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다만 이후 회사의 행보는 주목을 받았다.

      황금낙하산은 임기가 종료되지 않은 경영진에게 거액의 퇴직금 등을 지급하는 제도다. 주로 적대적 M&A의 방어 수단으로 활용된다. 회사는 수년 전 행동주의펀드가 본격 활동하던 시기 황금낙하산 규정을 정관에 담았다. 비자발적 해임의 경우 대표이사에게 300억원, 이사에게 100억원을 지급하라는 것이다. 창업주 홍기태 솔본 회장과 가족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인피니트헬스케어는 황금낙하산 조항을 삭제하고 며칠 뒤 김동욱 전 공동대표를 해임했다. 김 전 대표는 올해 들어 홍 회장과 갈등을 빚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표가 금융 투자를 늘리기 위해 인력을 줄이자는 홍 회장의 계획에 반대해 눈밖에 났다는 것이다. 회사가 김 대표에 대한 퇴직금 지급 의무를 없애기 위해 미리 황금낙하산 조항을 삭제한 것 아니냔 지적이 나왔다.

      창업주 입장에선 미리 마련한 경영권 방어 장치가 자충수로 돌아온 셈이다. 회사는 본업이 위축되며 병원 등 고객 피해가 불가피해졌고, 회사의 시끄러운 상황이 밖으로 알려지게 됐다. 중국에선 고객 공지 없이 갑자기 사업을 접으려다 현지 법원으로부터 제동이 걸리기도 했다. 애초에 오너 일가를 위해 책정한 퇴직금 규모가 사회적으로 용인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는 지적이 나올 수도 있다.

      한 로스쿨 교수는 "정관에 황금낙하산 규정을 넣을 수 있고 발동 조건도 너무 과하지 않다면 그 효력을 인정받는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애초에 정관을 무리하게 쓰다 보니까 법원에서 지거나 자충수가 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 외에 정관의 규정이 부족해 시끄러운 상황에 놓이는 경우도 있다. 상법은 이사의 수가 3명 이상이어야 한다고 규정하지만, 상한선은 두지 않고 있다. 고려아연도 이사 상한선을 두지 않아 무한 이사 선임 경쟁이 우려되기도 했다. 영풍·MBK파트너스 연합은 이사회 과반을 차지하기 위해 사외이사 12명, 기타비상무이사 2명 등 14명을 추전한 바 있다.

      구본성 전 아워홈 부회장은 지난 2022년 임시 주주총회를 소집해 이사 48명을 무더기 선임하려 했다. 지분 매각 시 이사회 3분의 2 이상 이사의 동의를 거쳐야 한다는 정관 규정 때문이다. 당시 아워홈 이사회는 구 전 부회장을 비롯해 25명이었다. 그 전에는 구지은 전 부회장이 이사회를 장악하기 위해 21명의 신임 이사를 선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