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밸류 선호' 투자업계와 심사기관의 엇갈린 'AI' 평가 시선
'AI' 강조는 역효과…업계 "해당 기조 상반기까지 이어질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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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로봇 관련 기업의 기술특례상장을 두고 투자업계와 심사기관 간의 온도 차가 점점 커지고 있다. 벤처캐피털(VC) 등 투자업계는 여전히 AI·로봇 테마를 기술특례상장에 적합한 고성장 분야로 평가하는 반면, 한국거래소와 기술평가기관 등 상장 심사 주체들은 'AI는 이제 진부하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다.
지난해부터 AI·로봇 기술을 앞세운 기업들의 기술특례상장 도전이 쏟아지며 '기술의 참신함'이 사라졌다는 게 업계 중론이다. 일각에서는 실제 기술력이 애매한 업체가 '테마'에 편승해 상장하려 한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23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최근 물류로봇 제조 전문업체 한 곳이 기술평가 등급 기준을 충족하지 못해 탈락했다. 기술평가는 특례상장 예비심사 전 거래소가 인정한 전문평가기관(2곳)에서 A·BBB 등급 이상을 받아야 통과할 수 있는 절차다.
이 회사는 업계에서 국내 로봇 제조업체 중 손에 꼽히는 기술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은 곳이다. 그러나 관련업에서는 최근 상장에 성공한 티엑스알로보틱스와 같은 수준이거나 그 이상의 독창성이 없다면 심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한 심사업계 관계자는 "AI·로봇 기술을 강조하는 기업이 너무 많다 보니, 심사관 입장에선 이제 차별성이 보이지 않는다"면서 "AI·로봇 분야는 기술력은 미국, 가격경쟁력은 중국이 주도하는 시장이라, 글로벌 경쟁 우위를 입증하지 못하면 떨어진다고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더이상 단순한 기술 보유만으로는 등급을 주기에 부족하다는 것이다. 비슷한 기술력을 내세우는 업체들이 봇물처럼 쏟아지며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다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한 기술평가 컨설턴트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자율주행, 정보처리 등 AI를 응용한 기술을 내세우는 기업이 대다수다"라며 "기술력 자체의 참신성이 희미해지면서, 실적과 시장 내 차별성을 더 중요하게 평가하는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테마에 편승에 상장하려 한다'는 우려섞인 시각도 적지 않다. 한 기술평가기관 출신 컨설턴트는 "컨설팅을 요청하는 기업 10곳 중 8곳은 AI·로봇 기술을 내세운다"며 "이 중 실질적으로 눈에 띄는 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10%도 안 돼, 상장이 어렵다고 현실적인 조언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와 달리 벤처 업계선 여전히 AI·로봇 기업에 대한 기대감을 여전히 거두지 않고 있다. VC, 증권사 등은 해당 분야 기업들이 상장 시 높은 밸류에이션을 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이라고 본다.
특히나 최근 기술특례상장의 문턱이 높아졌음에도, 여전히 빠른 엑시트(투자금 회수) 전략으로써 유효하다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한 중소형 VC 관계자는 "지난해 투자 포트폴리오에서 AI·로봇 분야 비중이 컸고, 올해 역시 비슷한 기조"라며 "바이오 쪽이 많이 위축되면서 신기술로서 여전히 주목받는 AI·로봇 쪽에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다"고 전했다.
증권업계도 마찬가지다. 한 증권사 IPO 담당자는 "내부적으로 매우 유망한 기업이라고 판단한 AI 관련 기업을 단독 주관사로 확보하기 위해 수개월째 접촉 중"이라며 "기술특례상장 취지에 부합하는 기술력을 가진 기업은 아직까진 AI·로봇 분야에 많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런 흐름 속에서, AI·로봇 열풍에 밀려 비교적 조명을 받지 못했던 반도체 장비, 바이오 소재 등의 분야가 '신선한 테마'로 부각되고 있단 의견이 나온다. 심사기관 내부에서도 이들 산업에 대한 평가가 AI·로봇보다 긍정적인 경우가 늘고 있다는 후문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한 고객사가 AI 기반 반도체 장비 기업이었는데, 오히려 AI 키워드를 빼고 반도체 장비 제조를 강조해 상장을 준비하는 쪽이 더 경쟁력이 있다고 판단해 설득했다"고 말했다.
결국 투자업계와 심사기관 간의 시각 차이는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기술특례상장 전문 컨설팅업체 대표는 "통상 거래소의 심사 기조는 반기 단위로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며 "AI·로봇에 대한 피로감이 고조된 만큼, 최소한 올해 상반기까지는 이들 기업의 상장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