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구매단위까지 인플레…생산능력이 따라가지 못해
수십조 투자해도 물리적 한계 탓 병목…현실성 낮다 평도
실탄 공급할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입지·수익 계속 오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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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AI)이 본격적으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한복판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강대국들이 국가 전략 차원에서 초대형 AI 인프라 선점에 나서면서 실탄을 제공할 반도체 산업지형도 급격한 변화를 마주하고 있다. 정부건 민간이건 당장 패권이 걸린 문제라 현실적인 지불·생산능력을 넘어서 입맛에 맞게끔 진영부터 구축하기 시작했다.
벌써 거품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지금 AI 투자는 군비경쟁처럼 치러지고 있다. 과열에 대한 고민은 뒷전으로 밀려난 분위기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물론 대만 TSMC와 미국 인텔까지 전방 군비경쟁에서 일익을 담당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 기업의 전략적 가치가 치솟는 만큼 경쟁이 격화하는 동안 반도체 산업 전반으로 막대한 자금이 흘러갈 전망이다.
美中 AI 견제 거듭하며 판 커지고 양강구도 고착화
최근 오픈AI는 엔비디아, AMD와 각각 10기가와트(GW), 6GW 규모 AI 반도체 공급 협력을 체결한 데 이어 브로드컴과도 손을 잡았다. 샘 알트먼 오픈AI 최고경영자(CEO)는 3사를 전후해 대만에서 TSMC와 폭스콘을, 이어 한국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각기 만나 마찬가지로 중장기 파트너십을 맺었다. 반도체 팹리스(설계)부터 파운드리(위탁생산), 패키징, 서버 조립, 고대역폭메모리(HBM)까지 AI 인프라 선점에 필요한 '드림팀'을 꾸리는 과정으로 풀이된다.
오픈AI의 광폭행보 뒤에는 미국 정부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연초 취임 일성으로 5000억달러(원화 약 710조원) 규모 스타게이트 프로젝트 구상을 내놨다. 민관이 합심해 초대형 AI 인프라를 구축하는 게 골자다. 오픈AI는 해당 프로젝트의 대마(大馬)에 해당한다. 중국에 AI 주도권을 내주지 않겠다는 미 정부 의지가 오픈AI를 중심으로 세력이 결집, 확장되는 형국으로 드러나는 셈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 때 부실기업으로 낙인 찍혔던 인텔을 전략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 달여 전 중국판 스타게이트 프로젝트가 출범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시각이 많다. 예상 규모는 2700억위안(원화 약 53조원) 규모로 미국에 미치지 못하지만 단위투자비나 인재 밀집도, 인력효율을 감안하면 액수로만 따지기 어렵다. 실제로 매달 발표되는 각종 집계에서 중국 AI 모델들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중국과 미국이 거듭 패를 주고받으면서 판은 커지고 양강구도가 굳어지는 모습이다.
반도체社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 AI 투자계획…'과열' 지적도
투자업계에선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AI가 미중 패권경쟁의 최전선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개별 기업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투자 계획이 쏟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오픈AI를 비롯한 AI 기업들은 몸값을 부풀려 자금을 조달하거나, 아예 공급사에 지분을 내주는 식으로 재원을 충당하고 있다. 미래 성장성을 내세워 자전거래를 통해서라도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건데, 지속 가능한 전략으로 볼 근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 벌써부터 나온다. 과거 닷컴버블과 유사한 전개라는 분석도 잇따른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가속기(GPU)나 HBM 구매 단위부터 GW나 월 웨이퍼 생산량(wpm)으로 뻥튀기되고 있다. 2017년 슈퍼사이클 때도 이런 식으로 구매가 이뤄지진 않았다"라며 "전력 소모량 1GW 기준 AI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GPU만 40만~50만장 정도인데, 16GW면 현재 TSMC, SK하이닉스, 삼성전자 생산능력의 몇 배에 달하는 캐파(Capacity)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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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AI와 같은 전방 고객사들이 이만한 투자를 감당할 수 있느냐를 넘어 공급사들이 수요를 따라가는 것조차 벅차다는 지적도 나온다. 엔비디아, AMD, 브로드컴은 설계를 담당할 뿐 실제 칩을 제조, 공급하는 건 동아시아에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TSMC의 팹(Fab)이다.
업계에 따르면 샘 알트만 CEO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월 90만장(wpm) 수준의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수치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외 마이크론까지 D램 3사 HBM 생산능력의 2배를 넘기는 규모로 파악된다. D램 캐파를 월 10만장 늘리는 데 통상 10조원에서 15조원가량이 필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주문에 맞춰 증설하자면 각사가 수십조원을 투자해야 할 판이다.
여력이 있다 해도 증설에는 여러 물리적 제약도 따른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모두 신규 팹 부지를 확보하고 일찌감치 인프라 투자를 진행해왔지만 전력이나 용수 확보, 규제장벽부터 장비 리드타임 등을 감안하면 여러 지점에서 병목이 발생할 수 있다. 양사 이전에 TSMC가 관련 캐파를 확보하지 못하면 어차피 GPU를 적기 공급할 수 없다. 핵심 장비나 소재 수급까지 감안하면 유럽, 일본을 포함한 전체 밸류체인이 같은 스케줄을 따라야 할 텐데,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평이다.
오픈AI만 급한 것도 아니다. 전방 빅테크 고객사 대부분은 하반기 들어 공격적으로 투자 계획을 확대했다. 각국 정부도 소버린AI 전략을 택하며 가속기 확보를 위한 구매행렬에 속속 합류 중이다. 연내 AI 투자 수요가 정점을 찍고 내년 HBM 판가 하락을 예상하던 투자가들도 재빠르게 시장 전망치를 수정하고 있다. 오픈AI가 내놓은 투자 계획이 없었어도 이미 공급부족을 가리키는 신호가 가득했다는 얘기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지금 HBM 외 범용 D램, 낸드까지 메모리 전 영역이 물량이 없어 가격이 치솟고 있다. 보수적으로 오픈AI 주문을 허위수요라 가정해도 내년 상반기나 연말까진 공급부족이 예상된다"이라며 "심지어 아직은 의향서(LOI) 단계라 공급사들도 보수적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HBM 전공정에 가속기 패키징, 전력 인입까지 팹을 늘리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칩 부족 전망 속 커지는 삼성전자·SK하이닉스 전략적 가치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아직 오픈AI와 구체적인 협력 방식이나 조건까진 다루지 않은 단계로 확인된다. 순서상으로도 최종 제품을 생산할 TSMC가 우선 협의를 마쳐야 한다. 그전까지 양사가 앞질러 판단할 수 있는 여지가 제한된다. 최근 되풀이되는 관세나 환율 변동 등 거시경제 변수까지 감안하면 내년 이후를 마냥 낙관하기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AI 주도권 싸움에서 양사의 전략적 가치가 크게 치솟는 구간에 들어섰다는 평이 훨씬 더 강하다. 오픈AI를 위시한 전방의 투자 계획들이 과열되며 일부 거품이 발생했다 쳐도 양사의 메모리 반도체 없이는 어차피 전쟁을 치를 수 없는 구도여서다. 고객사 발주가 기본인 TSMC의 파운드리에 비해 양사 주력인 메모리 반도체는 여전히 커머디티(상품) 성격이 짙어 과잉투자 위험을 일부 상쇄할 수 있다는 점도 유리한 지점으로 꼽힌다.
증권사 반도체 담당 한 연구원은 "오픈AI를 포함해서 지난 한 달 동안 발표된 투자 계획의 일부만 진성수요로 이어져도 2027년까지 공급부족이 불가피해 보인다. 증설에 물리적 한계가 있어서 주문이 몰렸다고 갑자기 공급과잉이 불거지진 않을 것"이라며 "컴퓨팅(연산) 수요를 반도체 공급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방향 자체엔 변함이 없어서 당분간 삼성전자, SK하이닉스의 실적이나 전략적 가치가 꾸준히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