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진출 속도내는 조선사들…"노란봉투·중대재해법에 납기 못 맞출지도"
입력 2025.10.20 07:00
    취재노트
    한화오션 중대재해 이후 조선3사 긴장감 고조
    중대재해·노조 리스크에 납기 지연 우려 확산
    빅3,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해외 생산기지 확보
    "반신반의하던 마스가, 본의 아니게 탄력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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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이재명 정부에서 국회가 첫 국정감사에 돌입하면서 조선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한화오션 거제조선소에서 발생한 브라질 선주사 감독관 사망사고가 도화선이 됐다. 올해 국감 증인은 건설사 경영진에게 집중됐지만, 한화오션 사고가 최근 발생한 만큼 조선업계도 안전과 하청 구조 관련 질의에서 자유롭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조선 빅3(HD현대중공업·삼성중공업·한화오션)는 올해 들어 중대재해 관련 사고가 이목을 끌면서 정치권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됐다. 중대재해처벌법 강화와 노란봉투법 시행을 앞두고, 조선업계는 법·제도 리스크가 생산 차질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조선업은 납기 준수가 곧 신뢰로 이어지는 산업이다. 완공이 지연되거나 공정 중 사고가 발생하면 발주처(선주)가 계약을 취소하고 선수금 환급을 요구하는 이른바 'RG콜(선수금 환급보증 실행)'을 할 수 있다. 이는 수천억원대 손실로도 직결된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완공을 못하거나 건설 과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한 방에 수주를 날릴 수 있다"며 "과거 조선·해운업 불황기엔 선주들이 납기일을 트집 잡아 RG콜을 실행한 사례가 많았다"고 지적했다.

      2010년대 조선업 대불황 당시, STX조선해양·성동조선해양·SPP조선 등이 연쇄 RG콜로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대우조선해양(현 한화오션)도 2015년 해양플랜트 납기 지연으로 RG콜이 잇따르며 조 단위를 훌쩍 뛰어넘는 손실을 기록한 바 있다.

      앞선 관계자는 "당시엔 해운업 불황으로 선주들이 배를 받기 싫어서 일부러 문제를 삼은 경우도 다수였다"며 "지금은 비록 호황이라지만 업계는 그때의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사고 발생 시 공정은 최소 2~3주 중단된다. 이 과정에서 하청업체의 생산 차질이 연쇄적으로 발생하고, 납기 지연이 반복되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특히 해양플랜트의 경우 납기 위반 시 손실은 수천억원 단위로 확대될 수 있다. 조선업 현장의 일당은 평균 20만원 선이지만, 고급 해외 기술자의 경우 일당이 수백만원에 달하는 까닭이다.

      조선업계가 납기 리스크에 더 민감해진 배경에는 법·제도 강화가 자리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건설업에 대한 중대재해 처벌 강화 방안을 발표했다. 연간 3명 이상 사망사고 발생 시 영업이익의 5% 이내 과징금을 부과하고, 공공입찰 참여도 3년간 제한하는 내용이다. 건설업 한정 조치지만 조선업계도 사고 재발시 이와 비슷한 강도의 규제가 있을까봐 긴장하고 있다. 중대재해 발생 시 CEO가 형사 입건되고, 법인에 최대 50억원 벌금이 부과되는 만큼 경영진의 부담이 크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또한 노란봉투법 시행 본격화로 하청노조의 단체행동권이 강화되고, 원청 기업은 하청 근로자와도 직접 교섭해야 하는 부담이 커졌다. 

      다른 조선업계 관계자는 "중대재해나 노조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생산 리스크가 현실화된다"며 "사고가 나면 공정이 2~3주 멈추는데, 이게 두어 번만 반복돼도 연간 납기 계획이 전부 틀어진다"고 말했다.

      최근 조선3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해외 생산기지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말 미국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1억달러에 인수하며 북미 거점을 마련했다. 에너지선(액화천연가스·암모니아 운반선 등) 중심의 사업 구조상 미국 내 생산 역량 확보가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HD현대중공업은 상대적으로 신중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HD현대는 오는 4분기부터 필리핀 수빅조선소에서 유조선 건조 작업에 착수할 예정이다. HD현대미포와의 합병을 통해 방산·전략상선 역량을 강화하는 한편, 필리핀 거점을 활용해 아시아 군함·함정 수요에 대응한다는 계획이다. 그룹 내부에서는 "정부와 노조, 정치권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도 나온다.

      삼성중공업은 국내 중심에서 베트남 중심의 생산기지로 재편을 구체화하고 있다. 중국 영성시 조선소는 최근 미중갈등으로 사업이 정체된 상황이다. 대신 베트남에 신규 조선소를 건설하고 수천억원대 규모의 투자를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조선사 해외 진출은 미국 주도의 '마스가(MASGA·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 프로젝트'와도 맞물린다. 마스가는 미국 조선업 재건을 위해 한국을 핵심 파트너로 지목한 프로젝트지만, 국내 조선업계의 초기 반응은 미지근했다. 미국 내 인프라·인력 부족으로 실질 건조는 한국 조선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수익성도 불투명하다는 이유에서다. 미국이 상업용 대형 선박을 자국 내에서 완전히 건조하기까지 최소 10년은 걸릴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국내 법·제도 리스크가 커지면서 해외 진출에 대한 명분이 생겼고, 마스가 프로젝트가 그 통로 역할을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마스가는 분명 새로운 시장 기회지만, 처음엔 반신반의하는 분위기였다"며 "그런데 국내 리스크가 커지면서 오히려 해외 거점 확보의 명분이 생겼고, 본의 아니게 마스가 프로젝트에 탄력을 싣는 구조가 됐다"고 말했다.

      해외 조선소 인수는 원래 부담스러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리스크가 더 크다는 게 업계의 주 판단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에서는 중대재해법 회피 목적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지만, 업계는 "법을 피하려는 게 아니라 생산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선택"이라며 반박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 법인이 해외 자회사 형태로 조선소를 운영할 경우, 중대재해법 직접 적용은 제한적이다. 현지 법률이 우선 적용되고, 한국 검찰의 수사 관할권도 미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조선사들은 국내 법·제도 환경이 단기간에 변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중대재해법이나 노란봉투법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조선업 특성상 사고 한 번이 수천억원 손실로 이어지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다. 업계는 이 같은 리스크를 감내하면서 국내 생산을 유지하기보다, 해외로 거점을 분산하는 쪽을 택하고 있다.

      조선 빅3의 해외 진출이 일시적 현상인지, 구조적 변화로 이어질지는 국내 법·제도 환경과 마스가 프로젝트의 향방에 달려 있다. 당분간은 국내 리스크 회피와 마스가 참여라는 두 가지 명분이 맞물리면서, 해외 생산기지 이전 흐름이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