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환율, 경제 넘어 정치 쟁점화…애널리스트 "요즘 가장 힘들다"
과거 정부 관련 리포트 삭제 사건 이후 '정책 코멘트 기피' 정서 고착
"결국 '누구' 책임…표현 하나도 '정파성 논란' 따져야 해 자기검열 불가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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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고환율 이슈가 국가 경제·정치 전반의 핵심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환율을 숫자와 논리로 설명해야 하는 증권가 애널리스트들은 "요즘이 제일 부담스럽다"고 토로한다. 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 후반까지 치솟은 원화 약세의 원인을 두고 정책·통화·해외투자까지 온갖 해석이 뒤섞이자, 분석의 방향보다 "결국 누구 책임이냐"는 질문이 먼저 따라붙는 분위기라는 이유에서다.
한 증권사 금융 연구원은 "요즘 취재 전화를 받으면 질문의 요지가 '왜 오르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 잘못이 더 크냐'는 식으로 온다"며 "금리·유동성·수급 등 여러 변수를 설명해도 곧바로 '그래서 뭐가 제일 큰 문제라는 것이냐'는 반응이 돌아와, 표현 자체를 더 완곡하게 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증권사 매크로 연구원 역시 "환율 전망을 물으면서 사실상 '이 방향으로 말해 달라'는 뉘앙스를 비치는 경우가 많다"며 "특정 요인을 짚었다가 나중에 정치적 논쟁으로 번지면 애널리스트 개인이 감당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져, 인터뷰를 아예 피하는 동료도 늘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연구원들의 '사리는 분위기'에는 배경이 있다. 몇 년 전 한 증권사 리서치센터에서 정부의 경제 정책을 두고 "민간회사가 국가의 정책에 동원되면서 주주 피로감이 커지고 있다"는 취지로 쓴 리포트가 공표 이후 별다른 설명 없이 홈페이지에서 삭제된 일이 있었다.
당시 회사 내부 게시판과 시장에서는 이를 두고 "리포트 작성자는 물론 회사 전체가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는 얘기가 돌면서, 정부 정책 관련 코멘트가 어떻게 '정치적 쟁점 사안'으로 비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로 남았다.
해당 금융사와 당시 정부 모두 외압 의혹을 부인했지만, 리서치 업계 내부 인식은 크게 달라졌다는 평가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진상이 어떻게 됐든, 그 사건 이후 하우스 전반적으로 정책 관련 문구 사전 검수와 발간을 더 보수적으로 가져가자는 기류가 확산된 건 사실"이라며 "정부 정책과 직접 연결될 여지가 있는 표현은 가급적 덜 쓰자는 정서가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환율이 정치·사회 이슈의 최전선으로 소환되자 애널리스트들의 부담이 커졌다는 게 공통된 설명이다. 정부가 환율 문제를 최대 현안으로 다루면서 기획재정부·한국은행·보건복지부·국민연금 등 4자 협의체를 구성해 외환시장 안정을 논의하고, 연기금 해외투자 비중 조정, 중앙은행-연금 간 스왑 확대, 전략적 환헤지 도입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거론되는 과정 자체가 연구원들이 직접적으로 언급하기엔 까다로운 '민감 변수'가 되고 있어서다.
'서학개미'의 과도한 해외투자가 원화 약세를 키웠다는 진단을 둘러싼 논란도 리서치센터를 위축시키고 있다. 최근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서학개미 관련 세제 페널티 가능성을 언급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논란이 커지자, 당국이 곧바로 "검토한 사실이 없다"는 해명 자료를 내는 등 메시지가 오락가락했던 탓이다.
한 증권사 매크로 애널리스트는 "연금·세제·해외투자까지 엮인 사안에 대해 기술적 효과만 설명해도 어느 한쪽에 서 있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며 "정책 수단 하나하나를 평가해 달라는 질문에는 아예 답을 하지 않는 쪽으로 내부 기류가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원화 약세의 배경과 원인을 단순화하긴 어렵다는 평가다. 금리차, 통화량(M2), 경제성장률 등 실물·자본 양쪽의 복합적인 흐름이 만들어낸 것이 현재 환율이다. 기업과 개인의 달러 비축도 원화 약세에 일조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시장 일각에서는 환율·금리·경기 전망이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일수록, 리서치가 정파성 논란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환율이 경제를 넘어 정치·여론의 중심 이슈가 된 상황에서, 증권사 연구원들의 '눈치보기'는 당분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한 전직 금융 연구원은 "과거 외압 논란 등으로 관련 리포트가 갑자기 사라졌던 이후,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정책과 관련해 '그 이상 묻지 말아 달라'는 정서가 자연스럽게 쌓이고 있다"며 "정작 시장이 필요로 하는 건 차분한 구조 분석과 숫자인데, 그 숫자를 해석하는 문장 한 줄을 두고도 눈치를 보게 되는 게 지금 리서치의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