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학개미→연기금→수출기업…고환율 '범인 찾기', 다음 타깃은 누구?
입력 2025.12.10 07:00
    과거 외환위기·금융위기 때와는 상황 달라
    달러 부족 아닌 원화 매력 저하가 근본 원인
    서학개미→연기금→수출기업…잇단 용의선상
    진짜 원인은 통화량 폭증과 부채 구조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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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원·달러 환율이 1470원 안팎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자, 정치권과 정부는 다시 '고환율의 주범' 찾기에 나선 모양새다. 서학개미(개인 해외투자자)에 이어 국민연금을 위시한 연기금, 수출기업까지 차례로 도마에 오르고 있다. 

      다만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초기와 비교하면, 이번 고환율은 특정 집단의 '행태'보다는 통화량(M2)과 재정·부채 구조 변화 등 펀더멘털에 뿌리를 둔 구조적 현상이라는 지적이 힘을 얻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가 돌리고 있는 칼 끝이 결국 돌고돌아 자신을 향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세 번의 1400원 돌파…과거엔 어땠나

      1997년 자유변동환율제 도입 이후 원·달러 환율이 1400원을 넘었던 시기는 크게 세 차례로 꼽힌다. ▲1997~98년 외환위기(IMF 사태) ▲2008~09년 글로벌 금융위기 ▲2022년 이후 이어지는 최근의 고환율 국면이다.

      외환위기 직전까지만 해도 원·달러 환율은 800원대 중후반에 머물렀다. 하지만 단기 외채에 과도하게 의존한 기업·금융권의 차입 구조, 취약한 외환보유액, 만기구조 불일치가 한꺼번에 드러나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1997년 12월에는 환율이 장중 1900원대까지 치솟았다.

      당시 고환율의 핵심 원인은 말 그대로 '달러 부족'이었다. 해외에서 차입을 연장(roll-over)하지 못해 만기가 돌아오는 외채를 갚을 달러가 모자라자, 기업과 금융기관이 동시에 외화를 확보하기 위해 달러를 사들였고, 국제신용등급 강등으로 외국인 자금이 급속히 이탈했다.

      환율 급등의 책임은 무리한 외채 확대와 부실대출을 주도한 대기업·금융권, 이를 방치한 정부·감독당국에 집중됐다. 외환시장 개입은 '방어'라기보다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의 일부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두 번째 고환율 국면도 성격은 비슷했다. 리먼브라더스 사태 이후 외국인 자금이 일제히 신흥국에서 빠져나가면서, 원·달러 환율은 2009년 3월 한때 1570원까지 상승했다. 외국인이 국내 주식·채권을 동시에 매도하면서 달러를 회수했고, 글로벌 달러 유동성 경색으로 국내 은행의 외화조달 비용도 급등했다. 단기 외채 비중이 높았던 국내 금융권은 다시 '롤오버 리스크'에 노출됐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고환율은 외국인 자금의 급격한 유출과 글로벌 달러 유동성 위기의 산물이었다. '누가 잘못했느냐'보다는 '미국발 금융위기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졌고, 정부·한은·금융권은 외화유동성 공급 장치를 강화하는 데 방점을 찍었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덮쳤던 2020년 3월에도 비슷한 양상이 반복됐다. 1000~1100원대를 오가던 환율은 팬데믹 공포가 정점을 찍었던 3월 중순 1280원 안팎까지 단기간 급등했다. 다만 전례 없는 감염병 위기라는 특수성이 컸던 만큼, 당시 고환율에 대해 특정 경제 주체를 지목하는 비난 여론은 크지 않았다.

      2022년 미국의 급격한 금리 인상과 함께 원·달러 환율은 10월 1444원까지 다시 올랐다. 이후 조정을 거쳤지만, 2024~25년 들어서는 정치 불확실성과 미 연준의 '매파적 완화' 기조가 겹치면서, 최근에는 1470원대까지 재차 올라 2009년 이후 최고 수준을 위협하고 있다.

    • 이번엔 '달러 부족' 아닌 '원화 매력 저하'

      문제는 지금이 1997년처럼 외환보유액이 바닥난 위기도, 2008년처럼 글로벌 금융시스템이 붕괴한 상황도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최근 4300억달러 안팎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고, 은행 외화유동성 지표도 위기 국면과는 거리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그럼에도 환율 레벨이 과거 위기 때와 비슷한 구간까지 올라오자, 정치권에서는 누구의 '탓'이냐를 두고 공방이 거세지고 있다. 이번에는 외환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원화를 굳이 들고 있을 유인이 떨어지는 방향으로 구조가 바뀐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현재 환율은 외국인 투자가 아니라 내국인 해외투자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외국으로 빠져나간 액수가 외국인 국내 투자 유입의 3~4배 수준"이라고 언급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서학개미→연기금→수출기업…차례로 올라온 '용의선상'

      정부와 금융당국이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올린 것은 서학개미다. 연말 1500원 돌파 우려가 커지자, 해외주식 결제 수요를 환율 상승의 주요 요인 중 하나로 지목하며 증권사 대상 '해외투자 영업 전면 점검'에 나섰다.

      다만 미국 증시에 전 세계 자금이 몰리는 것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고, 달러 인덱스가 약세를 보이는 국면에서도 유독 원화만 상대적 약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서학개미 책임론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실제로 개인의 해외주식 순매수는 원화 약세 요인 중 하나일 뿐, 외환수급 전체를 설명하기에는 규모가 제한적이라는 게 시장의 중론이다.

      정부의 시선은 곧 연기금으로 옮겨갔다. 국민연금의 해외투자 자산은 700조원 안팎, 전체 기금의 약 58% 수준까지 커졌고, 해외주식 투자만 놓고 봐도 500조원을 넘긴 것으로 집계된다. 국민연금의 해외자산 규모는 5000억달러를 넘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한국 정부의 외환보유액(4200억달러대)을 웃도는 수준이다.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을 '환율 안정의 캐스팅보트'로 규정하며 원·달러 스와프 확대, 환헤지 비율 상향 등 이른바 '뉴 프레임워크' 도입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국민연금은 본질적으로 국민 노후자산을 운용하는 기관이다. 장기 수익률과 책임투자, 자산군별 목표 비중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만큼, 환율 안정을 최우선 목표로 운용 전략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다. 미국 재무부가 '연기금·국부펀드를 통한 환율 조정'까지 감시 대상이라고 명시한 상황에서, 연금을 사실상 환율 방어 수단으로 쓰는 것 아니냐는 국제적 시각도 부담이다.

      국민연금이 외환안정협의체에 참여하고, 환헤지 비율 조정 논의까지 진행됐음에도 환율이 1400원대 후반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않고 있다. 이는 연기금 카드로 구조적 약세 압력을 되돌리기 어렵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수출기업도 새롭게 도마에 올랐다. 정부는 한국 기업들이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를 예전처럼 곧바로 원화로 바꾸지 않고 상당 부분을 해외에 쌓아두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3분기 국내 기업의 외화예금 월평균 잔액은 918억8000만달러(약 134조원)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출 증가율이 2% 수준에 그친 반면, 기업의 달러 예금은 같은 기간 8% 이상 늘어난 것으로 파악된다.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은 후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보유하는 '달러 쌓기' 전략이 강화되면서, 이른바 '래깅(lagging) 효과'가 원화 약세를 심화시키고 있다는 게 정부의 진단이다.

      다만 기업 입장에서는 환율 변동성과 글로벌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을 고려한 '위험관리'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대규모 설비투자·해외 M&A·대미 투자 약속 등을 앞두고 달러를 보유하는 것이 합리적인 의사결정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국내 기업의 해외 유보금과 해외 직접투자(FDI)도 사상 최대 수준으로 늘어난 상황이다.

      진짜 원인은 통화량(M2)과 부채 구조

      서학개미·연기금·수출기업이 고환율 국면에서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목되는 것은 통화량(M2)의 폭발적 증가와 재정·부채 구조의 변화다.

      한국은행 통계와 민간 분석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 출범 직전인 2017년 4월 M2는 2450조원이었는데, 임기 말인 2022년 5월에는 3698조원으로 증가했다. 60개월 동안 1248조원, 월 평균으로는 약 20조원씩 늘어난 셈이다.

      현 정부 들어서도 통화 팽창은 멈추지 않았다. 지난 9월 기준 M2 통화량은 4426조원으로, 새 정부 출범 직전인 5월(4270조원) 대비 4개월 만에 156조원 증가했다. 월 평균 39조원씩 늘어난 것으로, 문재인 정부 시기 증가 속도의 두 배 수준이다.

      한 국책은행 연구원은 "고환율 문제를 엄밀히 따지면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빚·유동성 잔치'의 나비효과로 보는 게 맞다"라며 "국가채무가 5년 사이 380조원 늘고, 가계부채도 GDP 대비 90%를 넘는 수준에서 금리 인상 여력이 크게 줄었다. 기축통화가 아닌 원화 입장에서 이런 구조가 지속되면, 결국 통화 가치 하락과 고환율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의 환율은 누가 달러를 조금 더 샀느냐, 누가 환헤지를 조금 덜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통화량과 재정·부채 구조가 수년에 걸쳐 바뀐 결과가 이제 표면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며 "외환위기 때는 달러가 없어서, 금융위기 때는 달러가 막혀서 환율이 뛰었다면, 지금은 원화를 들고 있을 유인이 떨어져서 환율이 오르는 구조다. 이 구조를 바꾸지 않은 채 특정 집단에 책임을 묻는다면, 고환율 논쟁은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