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에서 '2인자' 부회장이 (필요) 없어졌다
입력 2025.12.10 07:00
    Invest Column
    올해 그룹인사 핵심 키워드는 '부회장'
    오너리스크 가진 家臣 필요성 줄어
    보고 체계 간소화로 회장 직보해야
    오너 입장서 권력 나눠줄 필요 없어
    '2인자' 부회장 역할과 수명 끝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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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몇 년동안의 대기업 경영진 인사를 살펴보면 어느 왕조의 권력 투쟁 스토리, 그 중에서 한 부분을 도려낸 것과 닮아있다. <재벌의 탄생>과 <부자·형제 간의 전쟁>이라는 챕터에 이어 <확고한 계승자 뒤로 물러나는 가신(家臣)들>이라는 제목을 붙일만 하다. 오너 체제가 강화하고 그룹 2인자 타이틀을 달고 있었던 부회장들이 사라지고 있는 풍경을 빗댄 것이다. 재계에서 부회장들이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는 얘기다.

      삼성전자는 기존 정현호·전영현 2인 부회장 체제에서 전영현 1인 부회장 체제가 됐다. 사업지원TF를 이끌며 그룹의 살림을 챙겼던 정현호 부회장은 회장 자문역으로 물러났다. 전영현 부회장은 삼성전자 반도체 수장으로서 그룹 전체를 아우른다기보다는 DS부문의 책임경영을 맡고 있다. 다른 계열사엔 최성안 삼성중공업 부회장이 있지만 말그대로 회사 단독대표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크다.

      SK그룹은 2023년말 인사에서 조대식·김준·박정호·장동현 등 부회장단 다수가 2선으로 물러난 이후 오랜만에 부회장 승진자가 나왔다. SK수펙스추구협의회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을 맡았던 이형희 부회장이 그 주인공인데 역할을 놓고 보면 그룹 2인자라고 보긴 어려운 자리다. 그 외에 전문경영인 부회장들이 몇몇 있지만 과거와 달리 최태원 회장의 사촌 동생인 최창원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의장(부회장), 친동생인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등 실상 오너 일가 부회장들에게 힘이 실려있는 상태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취임 당시만 해도 6인 부회장 체제였다. 그런데 이번 인사에서 신학철 LG화학 부회장이 물러나면서 구광모 회장의 경영수업을 도와온 권봉석 ㈜LG 부회장 1명만 남게 됐다. 부회장 후보로 거론됐던 조주완 LG전자 사장도 물러나면서 LG그룹은 7년만에 1인 부회장 체제가 됐다.

      롯데그룹은 그간 2인자로 꼽혀왔던 이동우 롯데지주 대표이사 부회장을 비롯해 이영구 롯데 식품군 총괄대표 부회장, 김상현 롯데 유통군 총괄대표 부회장, 박현철 롯데건설 대표이사 부회장 등 부회장 4명이 모두 물러나면서 부회장단 전체가 사라졌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정의선 회장 체제에서 장재훈 부회장의 첫 부회장 승진 사례가 있었지만 그간 기조 역시 부회장단을 축소시켜왔다.

      한화그룹은 그룹 2인자로 불렸던 금춘수 부회장이 2024년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로는 그룹 경영 총괄을 맡고 있는 김동관 부회장과 경영지원실장을 맡고 있는 여승주 부회장이 있다. HD현대그룹은 정기선 회장이 승진하면서 조영철 부회장(HD현대 대표이사), 이상균 부회장(HD현대중공업 대표이사) 전문경영인 2인이 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나름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밖에 CJ그룹은 강신호 CJ제일제당 대표이사 부회장이 물러나면서 부회장 승진자가 없었고 GS그룹은 허용수 GS에너지 부회장과 허세홍 GS칼텍스 부회장 등 오너가 부회장이 탄생한 정도다.

      과거에 비하면 확실히 남아있는 부회장들의 '이름값'이 크진 않다.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오너 회장 옆에서 수행을 한다든지 전략·기획·재무통으로 그룹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말그대로 그룹 실세의 느낌은 아니다. 계열사나 사업을 책임지는 전문경영인 성격이 좀 더 짙다.

      LG그룹이 좀 특이한 케이스였다. 구본무 회장 시절엔 각 사업부문별 부회장단을 구성해 오너 일가와 전문경영인 부회장들이 함께 주요 계열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번 인사를 통해 부회장단 경영에 종지부를 찍었다.

      오너 3·4세 경영 체제로 전환되면서 부회장 수가 확연히 줄거나 아예 사라지는 건 재계 트렌드가 됐다. 책임 경영과 직할 체제 하에서 오너가 직접 의사결정을 할 타이밍이 왔고, 계열사 사장단 중심으로 현장 실행력이 더 중요해졌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과 오너 3·4세의 경영 스타일이 결합된 전략적 선택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술과 실행 중심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AI, SW, 기술 등 미래 기술 역량을 갖춘 실무형 리더를 전진 배치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과거 부회장이 전략, 기획, 재무 등 경영 지원 조직을 총괄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복잡한 보고 체계를 거치는 다수의 부회장단은 의사결정 속도를 늦추는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다른 관계자는 "오너 3·4세들은 대규모 투자와 사업 전환에 대해서도 '결정도 책임도 다 지겠다'는 기조 아래 직접 최종 판단을 내리는 직할 체제를 선호한다"며 "안팎으로 오너 회장의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조직의 안정감을 다지려는 경향이 짙어졌다"고 평했다.

      기업들이 전부 허리띠를 졸라매는 상황에서 조직 효율화와 비용 절감 측면도 무시할 수 없다는 평도 있다. 아무래도 부회장 직책은 오너 일가에 버금갈 정도로 최고 수준의 예우와 비용이 따르는데 경영 불황과 효율화 분위기 속에선 부회장 직책을 줄이는 것이 사내에 던지는 상징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그동안 우리는 재벌 가신이라는 이유로 많은 돈을 받지만 동시에 곤욕을 치르는 일도 종종 봐왔다. 가족간의 분쟁과 승계 과정에서 발생한 일들이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차 회장이 엔비디아 CEO 젠슨 황과 치맥을 하고 대중들 앞에서 나란히 서는 모습을 보는 시대다. 비용은 비용대로, 리스크는 리스크대로 짊어진 '가신', '2인자', '실세' 부회장의 역할은 필요 없어졌고 그 수명도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