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하이닉스 1주 가치는 곱절인데 멀티플은 마이크론 절반
슈퍼사이클 앞두고 ADR 통한 격차 줄이기 논의 활발한데
3차 상법 개정안 '소각 일변도' 자사주 처분 규정이 골치 평
규정 공백 메워 그간 왜곡된 자사주 정책 손 볼 필요 있지만
"주주환원 경로 다양한데…이런 식의 입법 맞나" 피로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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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하이닉스는 마진이나 제품 믹스, 자기자본이익률(ROE) 등 각종 투자지표에서 압도적인 1등 메모리 반도체 기업이다. 삼성전자가 종전 위상을 회복하고 있으나 순수 메모리 공급사로 좁혀 보면 1등 투자처는 여전히 SK하이닉스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SK하이닉스 주식은 업계 3위 마이크론의 반값에 거래되고 있다. 주식 1주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곱절인데, 거래 멀티플(배수)은 반토막이라는 얘기다.
투자업계에서 SK하이닉스 주가가 제 위치를 찾아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논의가 한창이다. ▲고질적인 코리안 디스카운트 ▲국내 주식시장 규모 ▲추종 자금풀 한계 등을 감안하더라도 이번 슈퍼사이클(초호황)이 예사롭지 않다. 당분간 사상 최대 실적을 계속 갈아치울 가능성이 높다. 증권가가 메모리 반도체 산업 전체에 적용할 기업가치 평가 논리를 새로 다듬는 가운데, 회사 안팎에서도 밸류에이션 갭을 좁히기 위한 고민이 치열한 분위기다.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활용하는 방안이 가장 주목을 받는다. ▲SK하이닉스가 자기주식을 외국계 은행에 예탁하면 ▲해당 기관이 미국 투자자를 대상으로 ADR을 발행하고 ▲현지 자금풀을 통해 마땅한 가치를 유도해 내는 식이다. 4일 기준 SK하이닉스 주가는 54만원 안팎에 거래 중인데, 현지 상장한 마이크론 주가순자산비율(PBR) 멀티플을 단순 적용하면 이론상 90만원 이상 가치도 인정받을 수 있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가 메모리 대장주인데도 글로벌 비교군(피어그룹) 대비 저평가돼 있는 건 명백하다. 오래 논의된 문제인데, 요즘 특히 뜨거운 주제"라며 "국내 증시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는 해외 투자 수요도 뚜렷하니 ADR을 발행하면 SK하이닉스는 물론 국내 증시로 글로벌 피어 밸류가 반영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SK그룹 내부에서도 수년 전부터 이 같은 방안을 검토해온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SK하이닉스는 3754만주(5.2%) 수준의 자기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이 중 2년 전 발행한 교환사채(EB) 대상을 제외한 물량이 약 1700만주(2.4%) 규모다. 시가 기준 약 9조원에 달한다. 정부나 정치권에선 자사주를 묵히지 말고 처분해서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라고 닦달중이다.
여러모로 때가 무르익었다는 판단은 많은데, 기업이 자율적으로 이 같은 방안을 추진하기엔 조심스럽다. 자사주 처분 규정 신설을 위한 3차 상법 개정안 통과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5일 국회에 제출된 '자기주식 의무 소각을 핵심으로 하는 상법 일부개정안'에는 ▲자기주식의 법적 성격을 명확히 하고 ▲소각 의무를 도입하는 등 보유·처분 절차를 대폭 강화하는 내용이 담겼다. 자사주는 회사의 자본 조정 항목이지 활용할 자산이 아니라는 점을 명시하는 게 개정안 주요 골자다.
실제로 자사주는 국제 회계기준(IFRS) 원칙상 자본 차감 항목이다. 매입 후 입맛대로 써선 안 되는데, 그간 재계에선 처분 규정 공백을 틈타 전략자산처럼 활용해온 측면이 있다. 묵혀두면 언젠가 의결권을 부활시켜 지배력 강화에도 활용할 수 있고 메자닌을 발행하는 등 유사시 유동성 보강 수단으로도 쓸 수 있었다. 주주 입장은 아랑곳 않고 쌀 때 사서 비싸게 시장에 되파는 경우까지 있었다.
법 개정을 주도하는 측은 기보유 자사주까지 1년 내 소각하도록 의무를 지우는 빡빡한 규정을 세우면 그간 허용된 우회로를 원천 차단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한번 매입한 자사주를 자산으로 취급할 여지 자체를 없애겠다는 의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사주 ADR도 우회 수단의 일종으로 분류될 수 있다. 자문업계에서도 개정안 통과 이후를 우려하는 시선이 전해진다.
대형 법무법인 한 관계자는 "애플이나 엔비디아 등 미국 우량 상장사들도 자사주를 인수합병(M&A)에 활용하고 있다. 기업이 직접 주주가치 제고를 위한 방안을 고민하게끔 법안을 짜야 했는데, 결과물은 소각만이 답이라는 식으로 기운 것 같다. 자본정책 자율성 침해, 부정 소지가 커 보인다"라며 "ADR에 활용하면 의결권이 살아나서 문제라는 얘기도 나오는데, 미국 시장 준법감시규정이 그리 녹록지 않고, 예탁한 IB를 통해 ADR 투자자가 직접 행사하는 구조라 문제 삼기 어렵다"라고 설명했다.
개정안 통과 후 자사주를 ADR에 활용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느냐에 대해선 아직 단정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그러나 개정안이 소각 외 예외 사유로 허용하는 범위가 너무 협소해 실질적으로 추진하기 어려울 거란 관측이 우세하다. 법률적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사주 ADR에 나서려는 기업이 있겠냐는 것이다.
그간 국내 기업들이 자사주 정책을 잘못 꾸려온 것은 사실이나, 이런 식의 법 개정이 무슨 소용이냐는 푸념도 새어 나온다. 고질적인 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소하고 좀 더 주주에 우호적인 풍토를 만들자는 취지에서 출발했는데, 입법 과정에서 지나치게 교조적인 결과물이 도출되는 것이 답답하다는 얘기다.
개정안을 자문했던 한 인사는 "양도제한 조건부 주식(RSU)이나 유동화, M&A 등에 활용하는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주주 이익에 부합하는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라며 "당초 법 개정 취지가 주주가치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졌는데, 소각만이 주주환원에 부합하는 수단인 것처럼 분위기가 흘러가서 답답하다"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