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분리' 논의 주역된 SK하이닉스…5년전 美배터리 투자실패 기시감
입력 2025.12.11 07:00
    취재노트
    과거 美 배터리 300GWh 러브콜…지금은 공장 축소中
    금산분리 완화시 美 AI 패권전략 올라타기 유리하고
    웨이퍼 단위 선구매 요청까지…전방 AI 수요도 강력
    리스크는 배터리 곱절…규제 풀면 실패위험 외부 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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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5년여 전 SK이노베이션이 처음 미국 포드에서 협력 요청을 받고는 내부에서도 숫자가 잘못 적힌 것이 아니냐면서 말이 많았다. 300GWh에 달하는 배터리 생산능력을 필요로 한다는데, 도저히 단일 고객사 파이프라인에서 소화 가능한 물량으로 보이지 않았다. 우려 속에 포드를 중심으로 SK온의 미국 진출이 이뤄졌는데, 결국 지금은 공장을 줄이지 않으면 생존이 힘든 상황까지 왔다"

      당시 SK그룹과 포드의 파트너십 출범을 자문했던 업계 관계자의 전언이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사업부(현 SK온) 물적분할과 프리 IPO(상장 전 투자유치)를 위해 확실한 성장 스토리가 필요한 참이었다. 포드는 금세 SK온을 위시한 그룹 2차전지 포트폴리오의 최대 파이프라인으로 등극했고, SK온은 수십조원 규모의 미국 투자에 나선다.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 기반 친환경 정책이 보증을 서는 격이라 감히 실패를 거론하기 어려운 분위기였다. 

      지금 SK하이닉스를 둘러싼 정부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를 두고 당시를 떠올리는 시각이 적지 않다. 금산분리 규제를 풀어주면 SK하이닉스가 외부 투자를 유치해 전방 AI 수요를 겨냥한 대규모 증설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재정부·산업통상부·금융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 등 관계부처는 조만간 금산분리 규제 완화 방안을 발표할 예정이다. 지주회사 구조인 기업이 사업 타당성이나 재원 부족을 입증하면 금융업을 영위하는 증손회사를 만들 수 있게 하는 등 내용이 거론된다. 

      특혜시비가 불거질 게 뻔하지만 명분이 없지는 않다는 평이다. 

      미국 정부는 대(對)중국 패권전쟁 일환으로 인공지능(AI)을 국가 전략산업으로 육성하려 한다. 취임 일성으로 우리돈 700조원 규모 스타게이트 프로젝트를 출범시킨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의지가 강력하다. 그런데 메모리 반도체가 병목을 일으키고 있다. SK하이닉스로 러브콜이 쏟아지는데, 자기자본으로 필요 투자금을 감당하기 어렵다.  

      정부가 첨단산업에 한해 규제 문턱을 낮춰주면 SK하이닉스가 공격적인 전략을 펼치며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핵심 조력자로 올라설 수 있다. 정부는 증손회사 보유 지분 규제도 기존 100%에서 50%로 낮춰주고 곧 출범하는 국민성장펀드의 참여도 허용케 할 방침이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지원이 뒷받침되는 데다 ▲국가 펀드가 앵커 투자자로 참여할 예정이니 ▲SK하이닉스는 전면에서 글로벌 AI 투자금을 쓸어담는 역할을 맡게 되는 식이다. 

      반도체업계 한 인사는 "지금 AI나 반도체 산업은 어차피 순수 자본시장 논리보다는 각국 국익이나 안보, 패권, 지정학 논리로 작동하고 있다"라며 "미국 정부도 인텔 지분을 사들인 데다, 대만 TSMC도 반쯤은 국영기업 성격이 강하다. 한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까지 핵심 카드를 둘씩이나 쥐고 있는데, 손 놓고 있기 어렵다는 시각도 일견 타당하다"라고 전했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나 삼성전자를 향한 반도체 구매 대기행렬이 예사롭지 않다. 일찌감치 수주산업 형태로 개화한 고대역폭메모리(HBM) 뿐 아니라 범용 D램이나 낸드도 공급이 부족해 현물가가 치솟고 있다. 고객사 재고는 정상 수준에 한참 미달해 역대 최저를 경신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선 3년 이상 장기계약 요구는 물론 팹(Fab) 웨이퍼 단계에서부터 구속력 있는 구매계약을 희망하는 고객사까지 등장하는 실정이다. 

      스타게이트 프로젝트의 주인공 격인 오픈AI 역시 지난 9월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를 각각 만나 대규모 협력을 요청한 바 있다. 업계에선 당시 오픈AI가 웨이퍼 기준 월 90만장 규모의 대용량·고성능 D램이 필요하다고 언급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오픈AI는 '반도체와 데이터 투입량이 곧 성능'이라는 이른바 스케일링 법칙을 가장 공격적으로 실행하는 기업이기도 하다. SK하이닉스가 신설 금융리스 자회사를 신설하고 국민성장펀드 자금을 활용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글로벌 AI 대기수요를 선점하는 것은 물론 펀드 역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미국발 AI 특수를 노린 특정 그룹의 반도체 대규모 증설을 제도적으로 허용·지원하는 게 맞느냐는 지적이 만만치 않다. 투자 매력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역시 천문학적인 탓이다.

      당초 금산분리 규제는 재벌이 은행을 사금고화하는 것 외에 제조업 실패가 금융사를 통해 사회 전체로 전이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 도입된 측면이 강하다. 지금 금산분리 규제 완화 논의는 천문학적인 반도체 CAPEX 부담을 SK하이닉스 단일 기업 재무 리스크에서 금융·정책 영역으로 분산하는 작업으로 비칠 가능성이 있다. 전방 AI 특수 기대감이 아무리 강력하다 해도 실패했을 때 리스크가 SK하이닉스를 넘어 확산될 수 있는 구조다.  

      외국계 투자은행(IB) 한 관계자는 "SK그룹이 SK온 실패 사례를 교훈 삼아서 이런 구조를 고안하고, 정부에 요청한 게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다"라며 "SK온에서 발생하는 부담은 현재 그룹이 수년 동안 짊어지고 있는데, 그보다 더 큰 베팅을 하려는 반도체에선 규제를 풀어 리스크를 분산할 수 있게 구조를 짜는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5년 전 SK그룹 배터리 사례와 너무 유사하면서도 리스크는 당시 곱절에 달한다는 우려가 많다. 반도체 산업은 배터리와 달리 매년 단위투자비가 치솟고 새로운 기술이나 공정이 개발되는데, 감가상각 속도는 몇배나 빠르다. 지난 5년 동안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메모리 사업에서 한해 부담하는 CAPEX도 20조~40조원 규모로 불어났다. 전방 수요가 급감하거나 가동률이 떨어졌을 때 발생하는 장부 타격 역시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미국 정부의 강력한 정책의지를 발판 삼아 선수주 후증설 방식의 전략을 택한다 해도 3~4년 뒤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당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이 점점 수주형 스페셜티(특화) 형태로 변화하고 있지만 막상 공급과잉 국면이 펼쳐지면 공급사 전체가 타격을 받게 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배터리 캐파 10GWh를 확보하는 데 대략 1조원 안팎이 필요한데 감가는 20년, 30년에 걸쳐 진행된다. 그러니 공급과잉이 길어져도 대기업들은 버텨낼 수 있는 것"이라며 "반면 반도체 팹은 삼성전자 만큼 현금을 쌓아두지 않는 이상 업황이 안 좋을 때 버텨낼 방법이 마땅치 않다. 같은 제조업이어도 리스크의 규모나 질은 물론 업계 전체에 미칠 파장이 너무 크다"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