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김성주의 국민연금'…스튜어드십 강화 속 커지는 '연금사회주의' 논쟁
입력 2025.12.17 07:00
    자율 규범에서 준(準)규제로
    정책·감독·연기금이 맞물린
    새 권력 구조의 시험대
    재계에선 벌써부터 우려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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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김성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 이사장으로 다시 임명되면서, 국민연금의 향후 운용 방향과 역할을 둘러싼 논쟁이 재점화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인사 적절성을 둘러싼 공방이 이어지고 있지만, 자본시장 안팎의 시선은 이번 인사를 계기로 국민연금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지에 더 집중되고 있다.

      국민연금은 국내 최대 기관투자가다. 적립금 규모는 1300조원을 넘어섰고, 국내 주식시장에서도 단일 투자 주체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 이사장의 성향과 철학은 단순한 조직 운영 차원을 넘어, 자본시장 전반의 규칙과 힘의 균형에 직접적인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도 '정치인 출신 이사장' 논란이 있었던 만큼, 연금의 정치화 가능성을 둘러싼 논쟁은 이번에도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

      김 이사장은 문재인 정부 시절인 2017년 말 취임해 2020년 초 사퇴했다. 그의 첫 임기에서 가장 큰 변화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식이었다. 2018년 스튜어드십코드 도입 이후 국민연금은 '수탁자 책임'을 명분으로 투자 기업의 지배구조와 경영 현안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9년 대한항공 주주총회다. 국민연금은 당시 한진그룹 총수였던 고(故) 조양호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고, 연임안은 부결됐다. 국민연금이 특정 기업의 최고경영진 연임에 공개적으로 반대 입장을 밝히고, 실제 의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상징적인 장면으로 평가된다.

      이후 국민연금은 일부 상장사를 '중점관리 대상'으로 지정해 배당 정책, 지배구조 개선, 이사회 운영 등을 두고 비공개 대화와 공개 주주활동을 병행했다. 

      이 과정에서 국민연금은 단순한 '장기 투자자' 이미지를 넘어, 기업 경영에 일정 수준 관여하는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국민연금은 "경영 간섭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유지했지만, 시장에서는 연금의 판단 자체가 기업 의사결정에 실질적인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왔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을 둘러싼 사후 논란과 해외 투자자와의 분쟁은 이런 인식을 더욱 굳혔다. 해당 합병은 2015년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추진됐고, 국민연금은 당시 정부와 시장의 시선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찬성 의결권을 행사했다. 

      이후 정권 교체와 함께 수사와 재판이 이어지면서, 국민연금의 투자 판단은 사후적으로 정치·사법적 검증의 대상이 됐다.

      여기에 해외 헤지펀드 엘리엇이 국제투자분쟁(ISDS)을 제기하면서, 국민연금의 단일 투자 판단이 정권 변화에 따라 국가 차원의 법적·재정적 리스크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본시장에 각인됐다. 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자칫 정치적 논쟁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경계심이 형성된 배경이다.

      그동안 이러한 긴장은 스튜어드십코드가 법이나 규제가 아닌 '자율적 원칙'에 기반해 운용돼 왔다는 점에서 일정 부분 완충돼 왔다. 그러나 새 정부 출범 이후 이 자율성의 범위가 제도적으로 좁아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그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여권과 정부는 스튜어드십코드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제도 개편 논의를 본격화하고 있다. 적용 대상 자산을 주식에서 채권·비상장 자산까지 확대하고, 기관투자가의 이행 여부를 감독당국이 평가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자본시장에서는 "자율 규범이 사실상 준(準)규제 체계로 이동하는 신호"라는 해석이 나온다.

      금융당국 수장의 발언 역시 이런 해석에 힘을 싣는다. 최근 이찬진 금융감독원장이 금융지주 사외이사 추천 경로 다양화를 언급하며 '국민이 추천한 기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자, 금융권에서는 국민연금 추천 사외이사 도입 가능성을 놓고 긴장감이 높아졌다. 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명분과 달리, 국민연금을 매개로 한 정부의 금융지주 지배력 강화 논란이 재점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김성주 이사장이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을 주도했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이런 제도 변화는 그의 두 번째 임기와 자연스럽게 겹쳐 보인다. 제도의 설계자가 이제는 그 제도가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환경에서 연금을 이끌게 됐기 때문이다.

      상법 개정 논의 역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자사주 의무 소각, 주주환원 강화 등은 기업가치 제고라는 명분을 갖고 있지만, 제도 변화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와 결합될 경우 영향력은 배가될 수 있다. 입법을 통해 규칙을 만들고, 감독당국이 집행력을 강화하며, 국민연금이 최대 주주로서 의결권을 행사하는 구조가 형성될 가능성이 거론된다.

      금융감독원의 최근 사모펀드·대체투자 시장 감독 강화 기조 속에서, 국민연금이 출자자로 참여한 투자 건까지 감독의 시야에 들어올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는 단순한 감독 범위를 넘어, 연기금과 민간 투자 시장 간 관계 설정 자체를 재편할 수 있는 변수로 받아들여진다.

      김 이사장은 과거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두고 '연금 자본주의'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연기금이 장기 수익률 제고를 위해 적극적인 주주로 행동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러나 현재 논쟁의 핵심은 주주권 행사 자체가 아니라, 스튜어드십코드가 정책 환경 변화 속에서 어디까지 제도화되고 확대될 수 있느냐에 있다.

      재계에서는 김 이사장의 복귀를 두고 '연금 사회주의'에 대한 우려를 제기한다. 국민연금이 다수 상장사에서 5~10% 안팎의 지분을 보유한 최대·핵심 주주라는 점에서, 연금의 판단이 경영권 안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만 해도 국민연금의 지분율은 7%를 넘어 최대주주 수준에 이른다.

      국민연금은 이제 '시장 참여자'이자 '공적 자금'이라는 이중적 성격 사이에서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랐다. 김성주 이사장 체제의 국민연금이 어떤 균형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연금의 역할과 자본시장의 규칙 역시 중대한 변곡점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김성주 이사장의 복귀는 문재인 정부 시절보다 더 강한 스튜어드십 행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며 "자율과 개입의 경계가 어디까지 허용될지에 따라 자본시장 전반의 긴장도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