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원 사수' 나선 정부…연기금·수출기업 동원·弱달러에도 흔들리는 환율
입력 2025.12.17 14:33
    달러인덱스 하락에도 원·달러 환율 1480원 돌파…'원화만 약세'
    정부, 국민연금 FX스와프 연장·수출기업 환헤지 요청 등 총력 대응
    업계 "속도는 늦출 수 있어도 핵심은 원화 신뢰 회복 등 구조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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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원·달러 환율이 고공행진을 이어가고 있다. 달러 약세 국면에서도 원화만 유독 힘이 빠지는 흐름이 반복되자, 시장에서는 '이젠 1500원대 진입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정부는 국민연금과 주요 수출기업을 외환시장 안정의 핵심 축으로 지목하며 대응 수위를 높이고 있다.

      원·달러 환율은 17일 장중 8개월만에 1480원 선을 돌파했다. 이번 환율 급등세가 더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글로벌 달러 흐름과의 괴리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달러인덱스는 98선까지 내려오며 연초 대비 8% 이상 하락했다. 통상 달러 약세 국면에서는 원화가 상대적으로 강세를 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이번에는 원화만 약세 흐름을 이어가고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12.3 계엄 사태 직후 환율이 1455원까지 급등했을 당시 달러인덱스가 110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재 환율 레벨에 대한 체감 부담은 더 크다는 평가다. 

      정부는 환율의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는 1500원 선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 수급 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최근 이형일 기획재정부 1차관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현대차, HD한국조선해양 등 주요 반도체·자동차·조선기업을 소집해 환헤지 확대를 요청했다. 기업이 선물환 매도를 통해 환헤지를 늘릴 경우, 은행의 현물 달러 매도로 이어져 단기적으로 외환시장의 달러 공급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이번 조치는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앞서 "수출기업의 환전 및 해외투자 현황을 정기 점검하겠다"고 밝힌 이후 이어진 대응이다. 기재부는 외화업무지원 태스크포스(TF)를 통해 기업 환전 동향과 해외투자 현황을 점검하고, 달러를 원화로 환전할 경우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시장에서는 민간의 외환 운용 전략에 대한 정부의 적극적 개입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하고 있다.

      국민연금도 외환시장 안정의 주요 카드로 다시 등장했다. 한국은행과 국민연금은 최근 650억달러 한도의 외환스와프(FX Swap) 계약을 내년 말까지 1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국민연금이 해외투자에 필요한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직접 조달하지 않고 한은 외환보유액을 활용할 경우, 단기적으로는 달러 수요를 줄여 환율 상방 압력을 완화하는 효과가 있다.

      다만 시장에서는 국민연금과 수출기업을 동원한 대응이 환율 급등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방향성을 바꾸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연기금과 기업의 해외투자·환헤지는 위험관리 차원의 임시방편에 가깝고, 이를 장기적으로 정책적으로 제약하기는 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대외 변수 역시 원화에 우호적이지 않다. 글로벌 증시에서는 'AI 버블론'이 재부각되며 위험회피 심리가 강화되고 있고, 이에 따라 달러 등 안전자산 선호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일본은행(BOJ)의 추가 금리 인상 가능성도 외환시장의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기준금리는 장기간의 제로금리 정책을 종료한 이후 단계적으로 인상돼 왔으며, 이번 회의에서 추가 인상 가능성도 거론된다. 엔화 강세가 나타날 경우 원화가 동반 강세를 보일 수 있지만, 일본의 성장 둔화와 글로벌 국채금리 상승 흐름을 감안하면 그 효과는 제한적일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번 원화 약세를 두고 한국은행 등 당국이 지목하는 요인은 외환 수급 구조의 변화다. 개인 투자자의 해외주식 투자 확대, 국민연금의 해외자산 비중 증가, 수출기업의 달러 보유 성향 강화가 동시에 맞물리며 원화 약세 압력이 강해졌다는 분석이다.

      통화량(M2)을 둘러싼 논쟁 역시 시장에서 이어지고 있다. 최근 M2의 급증이 원화 가치 하락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M2는 2017년 이후 약 5년간 1200조원 이상 늘었고, 코로나19 이후에는 증가 속도가 더 빨라졌다. 올해 들어서도 월평균 약 40조원씩 증가하며, 주요국과 비교해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구간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 시장의 문제의식으로 남아 있다.

      업계는 단기적으로 외환당국의 개입 의지와 국민연금·수출기업 관련 수급 조정 등으로 환율 상단이 제한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다만 정책 대응이 환율 급등의 속도를 늦출 수는 있어도, 펀더멘털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 한 환율 레벨 자체를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한 증권사 매크로 연구원은 "당국의 강한 개입 의지가 1500원대 진입을 지연시키는 효과는 있겠지만, 달러 사이클이 완화돼도 원화가 강하게 따라 붙지 못하는 흐름이 반복되는 것은 펀더멘털 프리미엄이 약해졌다는 신호"라며 "단기적으로는 1450~1500원 박스권을 예상하되, 대내외 경제 변수에 대한 원화 신뢰 회복이 지연될 경우 상단은 언제든 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환율 정상화 방법은 결국 정부의 단기 개입이 아니라 성장·재정·부채 구조에 대한 시장의 의심을 낮추는 방향에서 나오는 것"이라며 "1400원 이하로의 복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