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평판·가족관계까지… 신탁 수주 심사 범위 확대
모범규준 경직된 적용에 금융지주 계열사 부담 가중
“리스크 관리와 현장 간 간극” 실효성 논란 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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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크게보기-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부동산신탁사의 신규 수주 심사 과정에선 과거와는 사뭇 다른 서류들이 책상에 오른다. 이전까지는 딜(Deal)을 처음 소개해준 거래처인 ‘수주원’ 정도만 간단히 기재하던 보고서 뭉치 사이에 이제는 시행사와 시공사 대표는 물론 실무자들의 학력과 이력, 심지어는 신탁사 내부 담당 직원과 부서장의 사적인 인적 정보까지 담긴 ‘핵심관계자 현황’이 두껍게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 신탁사는 담당자의 가족관계증명서까지 요구하고 있다.
이 같은 변화의 발단은 지난해 5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금융감독원은 당시 일부 신탁사 임직원이 미공개 정보를 이용해 사익을 취하거나, 자금난을 겪는 시행사를 상대로 사실상의 고리대금업을 벌인 사실을 적발했다.
이에 당국은 지난해 11월 재발 방지를 위해 수주 심의 시 사업성 같은 정량적 평가 외에도 인적 유착 여부를 살펴볼 수 있는 정성적 요소를 내부 심의 기준에 포함하도록 권고했다. 금융감독원과 금융투자협회가 '부동산신탁사 영업행위 모범규준'을 제정해 현장에 본격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임직원의 비위를 근절하고 투명성을 강화하겠다는 취지에는 업계 전반이 공감했다. 그러나 정작 실무 현장에서는 규정과 현실 사이의 간극이 점차 커지고 있다.
수집되는 사적 정보의 범위가 점차 넓어지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꼽힌다. 모범규준 예시 양식에는 핵심 관계자들의 고등학교·대학교·대학원 학력과 업계 평판까지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당국은 이를 사업 특성에 따라 조정이 가능한 ‘예시’라고 설명하지만, 현장에서는 사후 검사 가능성을 의식해 제시된 항목들을 사실상 최소 요건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모범규준이 현실에선 경직되게 작동하면서 업계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한 부동산신탁업계 관계자는 “단순히 학연만으로 사업의 공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 맞는지 의문”이라며 “비리와 무관한 대다수 실무자의 행정 업무만 불필요하게 늘어난 셈”이라고 토로했다.
특히 금융지주 계열 신탁사들의 경우 내부 통제 기준이 한층 강화되면서 현장의 피로감이 더 커지는 모습이다. 학력 제출 대상이 거래처 대표에서 실무자까지 확대된 데 이어, 내부 담당자에게는 가족관계증명서까지 요구되는 까닭이다. 현장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수주 심사는 본질적으로 사업 리스크 검증에 초점이 맞춰져야 하는데, 인적 관계를 확인하는 신원조회 단계로까지 확장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현장에서는 현재의 방식이 실질적인 리스크 관리로 이어질지 미지수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학력이나 동문 여부만으로 수주 배제의 근거를 삼기 어렵고, 실제 사업 리스크와의 연관성 역시 뚜렷하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이와 관련해 한 금융권 관계자는 “각 기관이 사고 발생 시 부담해야 할 책임을 과도하게 의식하다 보니, 정보 조사 범위가 계속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며 “리스크 관리라는 본래 목적보다 사후 책임 회피를 위한 형식적 검증으로 흐를 가능성도 있다”고 지적했다.
물론 내부 통제 강화 조치 자체는 필요하다는 시각이 적잖다. 반복된 사고로 인해 감독당국과 시장의 신뢰 회복이 중요한 국면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다만 통제 강화가 곧바로 인적 관계 중심의 검증으로 이어지는 구조는 다시 한 번 점검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통제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지만, 신원 확인 범위가 확대되는 구조로 굳어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통제의 방향과 범위에 대한 세밀한 조율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