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니처 딜 가져와라"…증권가 덮친 '생산적 금융' 미션
입력 2026.02.04 07:00
    금융위 KPI·성과급 연동 주문…매월 점검 회의 등 성과 압박
    부동산 PF 대신 AI·반도체 정조준, '상징적 대형 딜' 선점 경쟁도
    "관리 효율"과 "정책 취지" 사이 고민…고밸류 기업으로 자금 쏠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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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픽=윤수민 기자)

      "최근 증권사 IB 인력들이 '시그니처 딜'을 발굴하겠다며 현장을 누비는 모습이 부쩍 눈에 띕니다." (한 벤처캐피털(VC) 고위 관계자)

      프리IPO(상장 전 지분투자) 단계나 유망 신산업 스타트업의 자금 조달 현장에 증권사 IB 인력이 등판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증권사들의 접근 방식 자체가 달라졌다고 입을 모은다. 

      과거에는 재무 구조와 단기 회수 가능성을 최우선으로 따졌다면, 최근에는 사업 모델의 실효성과 기술 로드맵까지 꼼꼼히 살피는 분위기다. 기존에도 증권사들이 참여해왔던 영역이지만, 이제는 프리IPO는 물론 그 직전 라운드까지 딜 소싱 반경을 넓히고 있다는 게 현장의 전언이다.

      정부의 '생산적 금융' 강화 기조가 선언을 넘어 실제 집행 국면에 진입하면서 증권사 내부 풍경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각자 고유 업무에 집중하던 IB 부서들이 최근에는 부서 간 벽을 허물고 모험자본 공급을 위해 전사적 역량을 결집하는 모습이다. 

      예컨대 PE·신기사본부가 생산적 금융 전략을 총괄하되, 커버리지와 IPO 부서가 현장에서 딜을 발굴해오고, 발행어음 부서 등이 투자를 검토하는 식의 '원팀' 체제가 핵심이다. 여러 조직의 파이프라인을 동원해 딜을 검토하고 투자까지 연결하는 구조다.

      이 같은 변화의 기저에는 상징성 있는 '시그니처 딜'을 확보해야 한다는 회사 차원의 아젠다가 깔려 있다. 국민성장펀드 1호 사업이 결정되고 금융지주 차원의 생산적 금융 실행 계획이 본격화되는 가운데, 증권사 수뇌부 역시 단순 투자 건수를 넘어 정책 기조에 부합하는 상징적 성과를 필요로 하는 분위기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투자를 할 거다'라는 선언을 넘어 구체적으로 '뭘 했느냐'는 실체가 중요한 국면"이라며 "상징성을 갖춘 시그니처 딜을 발굴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금융당국의 강력한 드라이브도 이러한 움직임을 촉진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생산적 금융 협의체' 회의를 격상하고 매월 정례 점검을 예고했다. 특히 당국은 생산적 금융을 조직 전체의 목표로 만들기 위해 금융사의 KPI(핵심성과지표)와 보상 체계, 리스크 부담 구조 설계를 주문하고 나섰다. 생산적 금융 실적을 실무자 인사 평가와 성과급 체계에 연동하라는 주문이 사실상 '성과 압박'으로 읽히는 대목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이에 따라 증권사들은 코스닥벤처펀드 등에 출자하는 간접 투자 방식에서 나아가, 직접 성장 잠재력이 높은 기업을 발굴해 독자적인 트랙레코드를 쌓으려는 '물밑 경쟁'에 돌입했다는 설명이다. 대외적으로 정책 호응도를 증명하면서도 견고한 수익성까지 담보할 수 있는 '대표성 있는' 기업을 선점하는 것이 시그니처 딜 확보의 관건으로 꼽힌다.

      과거 증권사의 투자는 부동산 PF나 메자닌 등 회수 속도가 빠르고 예측 가능한 수익 모델에 치중되어 왔다. 실적이 뒷받침되지 않는 적자 기업은 검토 대상에 올리는 것조차 사실상 불가능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정책적 기조에 발맞춰 인공지능(AI), 반도체 등 신산업 전반으로 딜 소싱의 범위를 점진적으로 넓히는 추세다. 

      퓨리오사AI, 리벨리온, 세미파이브 등 과거라면 증권사 내부 테이블에 오르기 어려웠던 기업들이 이제는 '알짜' 투자처로 각광받는 모습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사업 성숙도를 갖춘 데다, 생산적 금융이라는 정책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는 평가에서다.

      실무적으로는 모험자본 공급 비율 규제도 전략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발행어음과 IMA(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로 조달한 자금의 모험자본 투입 비율은 2026년 10%, 2027년 20%, 2028년 25%로 단계적으로 상향된다. 

      업계 관계자는 "소규모 딜을 여러 건 관리하기보다, 성장성이 뚜렷한 기업에 수천억 단위로 집중 투자하는 것이 관리 효율이나 정책 목표 달성 면에서 유리하다"고 귀띔했다.

      다만, 시그니처 딜 중심의 투자 전략이 생산적 금융의 정책 취지와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두고 내부 고민도 적지 않다. 업계 일각에서는 시그니처 딜 후보군이 시장에서 이미 검증된 기업에 치우치면서, 생산적 금융이 지향하는 '초기 모험자본 공급'과는 결이 다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수익성과 정책적 상징성을 동시에 고려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성장성이 이미 입증된 '망할 리 없는' 조 단위 기업으로 자금이 쏠리는 구조가 굳어질 수 있다는 우려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수익성과 상징성을 모두 갖춘 시그니처 딜을 선점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이것이 모험자본 공급이라는 정책 본연의 취지에 부합하는가에 대한 내부적 고민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