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확장 대신 과감한 ‘빅딜’…투자자, 주주환원 요구
입력 15.11.19 07:00|수정 15.11.19 07:00
삼성·롯데…자발적 구조조정 시행
성장 스토리, ‘선택과 집중’에 맞춰
‘완성품’만 M&A 대상으로 거론
주주·투자자, 배당확대 등 주주친화정책 주장
과도할 경우 기업 신용도에 영향
  • ‘선택과 집중’이 재계의 화제다. 주요 기업들이 굵직한 사업재편을 통해 잘하는 분야에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삼성과 한화에 이어 올해 삼성-롯데, SK-CJ간 빅딜(Big deal)이 성사되는 등 자발적 구조조정이 익숙한 광경이 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한 경쟁력 확보 전략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거래에 깊숙이 관여한 사람들의 말은 다르다. 한국경제와 산업계의 전반적인 기조변화, 그리고 이로 인해 커져가는 주주들의 힘이 그 이면에 있다는 시각이다. 최근 화두인 주주환원 요구와 무관치 않다는 것이다.

    ◇ '한국기업=확장과 고성장' 등식 폐기…잘하는 것 집중해야 생존

    과거 국내 대기업들의 구조조정은 재무적 위기와 유동성 부족에 시달리는 기업들이 채권단 요구에 떠밀려 진행하는 식을 의미했다. 예외적인 사례도 있었지만 드물었다.

    그러다보니 회사의 중장기 경쟁력 확보보다는 자금회수 목적의 구조조정과 시기를 놓친 '급매각'(Fire Sale)이 빈번했다. 몇몇 그룹들은 이미 경쟁력을 잃은 사업을 계속 유지하려다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도 했다. 부실사업의 유동성 위기가 주요 계열사들로 번져 이들까지도 한꺼번에 구조조정 매물로 내놨던 웅진·동양·동부 등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최근엔 다른 양상이 펼쳐지고 있다. 국내 대기업들이 스스로 선제적 구조조정과 사업부 재편에에 나서고 있다. 필요할 경우 알짜사업부를 처분하는 데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룹의 미래와 직결된 핵심사업이 아니라면 과감히 '빅딜'을 단행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스스로 인수·합병(M&A) 파트너를 찾아 거래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삼성그룹은 지난해는 한화와, 올해는 롯데와 빅딜을 성사시키며 화학과 방위산업 부문을 정리했다. 대신 삼성전자와 금융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에 더 힘을 싣는 모습이다. SK그룹은 CJ헬로비전을 인수하면서 주력인 통신·플랫폼 부문을 더욱 강화시켰다. 동시에 해외사업 확대를 추구해 온 CJ는 성장전략과 거리가 있는 비핵심사업을 정리했다. 계열사끼리 사업을 주고받으며 사업구조를 정비하는 모습도 빈번했다.

    자발적 사업재편의 모토는 "불필요한 사업을 정리하고 잘해온 것에 더 집중한다"로 요약된다. 이미 상위 10대그룹 상당수는 과거 문어발식 계열사 확대로 대변되는 확장정책을 접는 대신, 핵심사업을 먼저 선택한 후 가장 효율적이고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사업부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런 전략이 부각된 배경으로는 한국경제와 산업 전반에 드리운 '성장세 둔화'가 꼽힌다.

    경기 사이클에 힘입은 주요 산업의 활황세와 200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기업들의 풍부한 유동성에 기반한 한국기업들의 성장세는 그 자체만으로도 투자자와 주주들의 만족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예년 같았으면 유보금이 생겨도 "신사업 투자에 쓰겠다"고 선언했고, 주주들도 흔쾌히 이를 용인했다. 배당을 적게 해도 계속 성장하고 글로벌 시장점유율이 상승해 기업가치가 높아지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기업들은 전·후방산업을 막론하고 성장세가 둔화된 지 오래다. 향후 성장가능성에 대한 전망도 불확실하다. 중국의 추격세에 따른 경쟁력 상실이란 악몽도 남아있다. 몇 차례 대규모 투자와 신사업 인수를 단행했다가 크게 실패한 사례들도 늘어났다.

    '이머징 마켓'의 하이리스크-하이리턴(High risk-high return)을 기대한 투자자들의 만족감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기업들도 이제는 이를 인지했다. 그래서 최근 써내는 성장스토리는 '고성장과 신사업 확장'이 아닌 '철저한 선택과 집중'에 맞춰져 있다. 현금이 나오는 알짜사업부라고 해도 '코어비즈니스'가 아니라고 판단하면 다른 대기업과 교환하는 빅딜도 연일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다.

    최근 M&A 시장에서 대기업들이 찾는 대상이 주로 확고한 시장지위와 수익성을 보유한 기업들이라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투자금융(IB)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대기업이 성장잠재력을 보고 중소기업을 인수해 더 잘 키워낸 사례가 있었으나 이제는 그런 모습이 사라졌다”며 “당장 시너지를 낼 수 있는 ‘완성품’만이 M&A 대상에 오르고 있다”고 설명했다.

    ◇냉정해진 투자자들…'이익 돌려달라' 주주환원 요구 점점 커져

    주주나 투자자들 입장에서 보면 한국기업들에 대한 만족감이 갈수록 줄어드는 모습이다. 그러다보니 그간 참아왔던 '주주로서의 권리'를 요구하고 '배당'이라는 뚜렷한 당근을 주장한다.

    예전처럼 빠른 성장 자체만으로 주주들과 해외 투자자들을 달랠 수 없어졌으니 기업들은 이들을 달래기 위한 '주주친화정책'에 대한 부담감을 감내해야 할 상황이 됐다.

    62조원의 현금을 쌓은 삼성전자가 주주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11조3000억원 규모의 자사주 매입 후 소각 결정을 발표하는 것도 한 예로 꼽힌다.

    한 외국계 증권사 연구원은 “삼성전자의 2분기 실적이 발표된 이후에도 해외 투자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아 IR부문에서 기관투자자들을 접촉했다"며 "주주들의 인식이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보니 이재용 부회장도 관련 내역을 직접 챙기는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이 와중에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헤지펀드 엘리엇 사태로 '불만족스러운 주주'의 무서움을 확인했다. 어떤 식으로든 주주들에게 '당근'을 제시하는 것이 수순인 셈이다.

    SK텔레콤의 경우 상대적으로 다른 대기업보다 주주환원에 부지런한 편이었음에도 주주들의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3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 당시 국내외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은 CJ헬로비전 인수만큼이나 회사의 배당확대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다. 해외 통신사들처럼 주주들에게 이익을 더 돌려줘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한 증권사 통신담당 애널리스트는 “해외 통신사들은 유틸리티업체 성격이 강해 이익의 80%까지 배당으로 준다”며 “SK텔레콤은 이에 한참 못 미치는데다 최근 성장성은 둔화되고 투자도 줄이면서 이와 같은 요구가 강해졌다”고 설명했다.

    이런 움직임은 몇몇 대기업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금융투자에 따르면 지난해말부터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액이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조7000억원을 넘겼던 유가증권시장(코스피) 종목들의 자사주 매입규모는 올 하반기부터 다시 증가하고 있다. 8월엔 6394억원, 9월에는 7680억원으로 늘어나고 있으며, 지난달에도 5000억원을 넘겼다.

    이 같은 트렌드 변화는 어쨌든 한 단계 진전한 산업과 자본시장의 모습이라는 평가도 많다.

    기업들은 한정된 자산으로 최대한 장기생존이 가능한 사업구조를 만들고 있고, 이 과정에서 벌어지는 빅딜 또한 시장의 경쟁을 완화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크리스 박 무디스 부사장은 “경쟁강도는 약해지고 규모의 경제 효과는 누릴 수 있어서 사업적으로는 긍정적인 현상”이라며 “이런 식의 빅딜이 트렌드가 될 것이며 향후 강한 기업과 약한 기업의 격차를 벌리는 촉매역할을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기업 입장에선 감내해야 할 부담이 늘어난 것도 사실이다. 경영전략을 짜는데 있어 주주와 투자자들의 영향력이 한층 강화됐고 이들을 더 신경써야 한다. 이로 인해 늘어나는 재무적 부담도 감내해야 한다. 섣불리 접근하다가는 기업 신용도 등 평판문제에도 영향을 끼칠만한 변수가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