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은행 혁신, 정부의 '꼭두각시' 줄 끊는게 최우선
입력 16.07.05 07:00|수정 16.07.12 10:22
산은이 대우조선을 지나치게 오래 품어
혁신안도 매번 알맹이 빠져
정부가 뒤에서 조종하는 구조 깨져야
정책금융기관 감독할 지주회사 설립 '시급'
  • 대우조선해양 부실경영 사태를 통해 산업은행의 민낯이 드러났다.  오랜 기간 주인으로 있었으면서도 산업은행은 자회사 통제시스템을 제대로 작동시키지 못했다. 구조조정 주역으로 해야 할 역할과 정체성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이동걸 회장이 발표한 산업은행 혁신안도 시장의 공감을 전혀 끌어내지 못했다. 급조한 티가 역력했고 보여주기식 일회성 대책만 가득 담겼다.

    시장 관계자들 대다수는 산업은행이 작금의 상황을 맞이한데에 대한 가장 큰 원인을 '정부'로 꼽는다.  앞에서는 정책금융 집행자로서 역할을 강조하면서 뒤에서는 선심성 정책이나 보은인사를 위한 도구로 활용하며 흔들어댔다. 산업은행 민영화를 백지화하며 정책금융 역할을 강조했지만, 그에 걸맞은 권한과 자율성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정부와 정책금융기관의 역할론이 재정립되지 않을 경우 이 같은 사태는 또 다시 반복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높다.

    ◇대우조선 총체적 난국…“産銀 아래 너무 오래 있었다”

    지난달 감사원이 발표한 산업은행 감사결과는 정책금융기관과 우리나라 구조조정 시스템에 대한 불신을 불러오기에 충분했다. 대우조선해양은 2012년 이후 해양플랜트, LNG운반선 프로젝트의 매출을 과다 계상하는 방식으로 5조원대 분식회계를 감행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상태 전 사장은 20억원의 뒷돈을 챙겼고, 임원들은 수 십억원의 성과급을 챙겨갔다. 180억원을 빼돌린 직원도 있었다.

    산업은행의 관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자회사들은 고위직 임원들의 인사적체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통로였지만, 그 달콤함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산업은행 부행장 출신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분식회계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고, 나홀로 영업이익을 내는 것처럼 꾸며진 실적에 따라 수 천억원의 성과급도 지급됐다.

    해당 지역의 조선업 근로자들도 어느 회사의 어떤 프로젝트가 지연되고 손실 가능성이 있는지 아는 마당에, 산업은행의 관리와 대응은 너무 안일했다는 지적이다. 산업은행은 회생 가능성이 크지 않음에도 당장 미칠 파장을 우려해 우선 회사가 연명할 수 있는 자금지원을 결정했다. 이 과정에서 ‘수출입은행이 대우조선해양에 과도한 선수금환급보증(RG)를 끊어준 탓에 부실이 커졌다’며 책임을 돌리려 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린다. 산업은행은 여론이 악화하자 그제서야 뒤늦게 고강도 자구노력을 요구하고 나섰다.

    금융전문가인 산업은행이 비전문 분야인 각 산업에 너무 오래, 깊숙하게 관여했기 때문에 생긴 문제라는 지적도 있다. 당시의 선택과 자금 지원에 대한 판단이 옳았다 치더라도, 오랜 기간 산업은행 아래서 부실이 확대된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국적 해운사 구조조정에서도 산업은행은 회사채 신속인수제 등 지원을 하긴 했지만, 산업의 경쟁력을 살릴 근본 대책은 마련해주지 못했다. 위기가 있을 때마다 희생과 자구 노력을 먼저 강조했다. 배를 소유하기보다는 빌리라고 했고, 알짜 사업부는 매각하도록 했다. 정부와 산업은행 입장에선 그러한 노력이 없었다면 회사가 오래전에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항변할 수 있지만, 업황이 회복되었을 때 수혜를 누릴 기반이 약화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알맹이 빠진 혁신안…정부 바뀌지 않으면 무의미

    대우조선해양 사태에 질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은 머리를 숙였고, 방대한 분량의 자구안을 내놓았다. 수 십 년간 구조조정의 주역으로 활동해왔던 산업은행이 기업구조조정 지원 특별자문단을 새로 만들어 외부 의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미래 신성장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금융 지원체계도 구축하고, 비금융 출자회사도 집중 매각한다. 여신심사 및 자산포트폴리오를 개선하고, 인사 및 조직체계도 바꾸겠다는 내용도 담았다.

    백화점식 부실에 백화점식 혁신안으로 대응했지만, 핵심은 빠져 있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궁극적으로 산업은행의 주인인 정부가 달라지지 않는 한 산업은행이 자체적으로 추진하는 혁신안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산업은행은 과거 우리나라 경제개발이 본격화하던 시기에 자금줄 역할을 하며 경제 성장의 주춧돌 역할을 했다. 그러나 산업은행에 바라던 역할은 시장은행으로 많이 옮겨갔고, 산업은행의 정체성도 모호해졌다. 이명박 정부의 산업은행 민영화 추진과 박근혜 정부의 민영화 백지화가 이어졌다.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는 분리 4년 만에 다시 합쳐졌지만, 조직은 비대해졌고 통합 과정에서 갈등이 표출되기도 했다.

    회장 인사도 정권의 의중에 따라 이뤄졌다. 강만수 전 회장은 이명박 정부 시절 대통령 경제특별보좌관을 지냈고, 홍기택 전 회장은 박근혜 정권 대통령직 인수위원을 거쳤다. 지난 대선 당시 금융인들의 박근혜 당시 후보 지지 선언을 주도한 이동걸 현 회장도 대표적인 금융권 친박(親朴) 인사로 통한다. 산업은행 자회사인 대우조선해양도 낙하산 인사를 피할 수 없었다. 부실의 주역인 전 사장들은 정권 실세의 비호를 업고 회사를 주물렀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최대주주로 있는 회사의 사장으로 취임하는 인사들은 거의 정권과 연관이 있고 산업은행을 어려워하지도 않는다”며 “자회사 사장들은 산업은행에 들어와서 회장만 보고 부회장은 보지도 않고 가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사장이 CFO의 역할과 권한에 제한을 둬 산업은행의 눈을 가렸기 때문에 부실을 파악하기 어려웠을 것이란 항변도 있다.

    ◇오락가락 정부 정책에 산업은행도 엇박자

    정부 정책도 오락가락했다. 정부는 지난해 첫 기업구조조정 협의체 회의를 열었지만, 실질적인 움직임은 지난 총선 후에야 본격화했다. 정부가 뒤늦게 위기의식을 갖고 5대 취약업종에 대한 구조조정을 강조하자, 산업은행도 그에 따라나선 모양새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연초 STX조선해양에 대한 지원을 결정했지만, STX조선해양이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아 회생절차에 들어가며 빈축을 샀다.

    산업은행은 지난해 비 올 때 우산을 뺏지 말라는 정부 방침에 따라 삼성중공업에 대규모 여신을 지원했는데, 돌아온 것은 대규모 손실 발표였다. 조선업 부실의 주범으로 꼽히는 해양플랜트 사업도 한때는 정부가 미래 먹거리로 꼽고 장려했던 분야다. 한진중공업은 과거 사업 축소를 고려했지만, 지역 민심을 고려한 정치권과 정부의 반대에 막혔고, 그에 따른 재무부담을 고스란히 지게 됐다.

    정부에 있어 산업은행은 해외 에너지 개발사업과 이란과의 경제협력 등 사업에서 가장 좋은 선전창구이자 조력자였다. 민감한 문제가 발생하면 산업은행이 앞장을 섰고, 정부는 뒤로 숨었다. 산업은행은 주채권은행이 아닌 대우건설과 KDB생명을 정치적 판단에 따라 인수하게 됐고, 여전히 짐을 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독려하는 비금융 출자회사 매각을 모두 성사시킨다 해도, 잘못 나간 대우조선해양 성과급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 산업은행에선 ‘연중 상시 감사 체제’라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박근혜 정권의 수혜자로 꼽혔던 홍기택 전 회장의 반발도 터져 나왔다. 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지원은 청와대 서별관회의에서 일방적으로 결정됐으며, 산업은행은 들러리 역할만 했다고 주장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서별관회의는 관계 기관의 실무 협의가 이뤄진 내용을 점잖게 확정만 하는 자리고, 그에 앞서 금융위원장 주재의 회의가 수차례 이뤄졌다”면서도 “산업은행이 정부 의중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홍 전 회장은 이후 사전 협의가 있었다고 해명했다.

    ◇”정책금융 컨트롤 타워·정부 책임 있는 자세 필요”

    정부의 정책금융기관 간의 역할 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컨트롤 타워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현 상태로는 대우조선해양 사태가 재발해도 이상할 게 없다는 것이다.

    항상 산업은행을 앞장세우다 보니 최근 정부가 강조하는 시중은행의 구조조정 역량은 기대하기 어렵다. 새로운 구조조정 기구인 유암코는 아직까지는 산업은행의 역할을 일부 나누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산업은행뿐 아니라 수출입은행, 기업은행 등 이곳저곳 흩어져있는 정책금융기관의 중복 기능을 조정·감독하고 기관 간 마찰을 줄일 지주회사가 설립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독일·프랑스·일본 등은 정책금융기관의 지배구조를 이사회와 감독이사회로 이원화해 확실한 컨트롤타워를 만들어놓았다. 감독이사회 구성원은 각 부처 장관과 노조대표다. 부처 장관들은 정책금융기관 간 과당경쟁을 막는 임무를 수행한다.

    정책금융 지주사를 설립하자는 제안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그러나 각 부처는 매번 각자의 이해관계에 막혀 번번이 좌절됐다. 수은은 기획재정부가, 산업은행은 금융위원회가 품에 안고 감쌌다. 국회는 민감하다는 이유로 논의대상에서 제외해왔다.

    금융연구기관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내놓은 혁신안은 그야말로 ‘을(乙)’의 입장에서 내놓은 무의미한 방안”이라며 “정부가 나서 정책금융기관의 중복된 기능을 통합·축소하고, 문제가 발생할 경우 정부 담당자도 나서서 책임을 지는 실질적인 의미의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