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인사 끝나자 인사 다니기 바쁜 IB
입력 17.03.14 07:00|수정 17.03.15 09:47
올해 유독 신설조직·새 전략라인 인사 많아
입지 좁아진 IB, 새 라인 만들기에 총력전
불안정한 경제 및 정국…결실 없는 행보 우려
  • 주요 기업들의 인사가 마무리 단계에 들며 투자은행(IB)의 발걸음도 다급해지고 있다. 새 경영진과 미리 관계를 다져두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좁아진 설 자리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감돈다. 국내 정세가 어수선하고 기업의 움직임이 둔화하고 있어 IB들은 당분간 '결실 없는 얼굴 비추기'를 이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주요 그룹들의 인사는 여느 해보다 대규모로 단행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생존을 위한 기업들의 고민이 반영됐다는 평가가 많았다.

    최고경영진을 세대교체한 SK그룹은 수펙스추구협의회 구성원이 젊어졌고, 인수·합병(M&A) 전문가 위주로 꾸려지게 됐다. SK 지주사 합병을 이끈 조대식 의장, 그룹 M&A 전문가인 박정호 SK텔레콤 사장 등이 대표적이다. 최태원 회장 부재 중 그룹을 이끈 김창근 수펙스 의장과 정청길 SK이노베이션 부회장, 김영태 수펙스 커뮤니케이션위원장은 뒷선으로 물러났다.

    CJ그룹은 3세 경영의 신호탄을 쐈다. 복귀를 앞둔 이재현 회장의 장녀인 이경후 미국지역본부 통합마케팅팀장과 사위 정종환 미국지역본부 공동본부장을 상무대우로 승진시켰다. CJ대한통운 부사장 자리에는 M&A 전문가인 이희재 부사장을 영입하는 등 M&A 라인도 강화했다.

    한화그룹은 'M&A통'인 금춘수 사장이 2015년 하반기 이후 공석이던 그룹 부회장 자리에 단독으로 올랐다. 금 부회장은 경영기획실장을 맡아 삼성과의 '빅딜'에 관여하는 등 태양광·방산·석유화학 등 인수·합병(M&A)을 총괄해왔다. 앞으로의 영향력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렇 듯 주요 그룹 수뇌부의 변동 폭이 여느 해보다 크다 보니 지배구조 및 재무구조 개선, M&A 등 아이디어를 제공하며 먹고 사는 IB들도 새로 안면 쌓기에 분주해졌다. 고객 그룹의 해외 행사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경우도 나오고 있다. 실사와 함께 간간히 재무자문을 맡는 회계법인은 물론, 그룹 밖에서 법률 해석을 내어주는 법무법인도 마찬가지다.

    한 외국계 IB 관계자는 "기업들이 갈수록 IB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면서 ‘눈을 뜨고 있어도 코를 베이는’ 경우가 점점 잦아지는 분위기다"며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입지만 좁아질 것이기 때문에 새로 바뀐 그룹들의 임원진과 전략 라인을 접촉하는데 힘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외국계 IB들은 지난해 국내 기업 해외 M&A 사상 최대거래인 삼성전자의 하만(Harman) 인수를 비롯해 로엔엔터테인먼트, LG실트론 등 굵직한 거래에 참여하지 못하거나 진행조차 인지하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다. 앞선 세대의 퇴진과 다음 세대의 부재, 글로벌 본부의 한국시장 축소 움직임, IB 무용론 등 처한 상황이 녹록지 않다.

    그나마도 IB가 찾아갈 곳이 분명하게 있는 경우는 사정이 낫다. 삼성그룹이나 롯데그룹, LG그룹 등은 IB들이 접촉 지점을 찾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삼성그룹은 60년 가까이 유지한 그룹 중심의 경영방식을 포기했다. 전략과 M&A를 진두지휘하던 미래전략실을 해체함에 따라 개별 계열사의 각자도생 체제가 시작됐다. 변혁기를 맞은 계열사나 접점을 찾아야 하는 IB나 혼란스럽긴 마찬가지다. 이재용 부회장 구속 여파로 본격적인 경영진 인사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

    롯데그룹도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단행했다. 그룹 컨트롤타워였던 정책본부가 해체되고 경영혁신실이 신설됐다. 이 밖에도 그룹의 중간지주사 역할을 할 4개의 비즈니스유닛(BU) 체제를 갖춰 계열사들의 독립경영을 강화하고 나섰다. 롯데그룹 거래에 관여했던 자문사들은 '누굴 찾아야 하느냐'며 볼멘 소리를 하고 있다.

    LG그룹은 신사업추진단장을 맡았던 구본준 부회장이 전면에 나서면 기존 사업까지 총괄하게 됐다. 다만 재무팀 산하에 소속돼있는 M&A 전담조직의 확장과 관련해선 손을 대지 않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M&A 시 주체가 그룹인지 계열사인지 모호하다는 지적이 많다.

    IB 업계 관계자는 "그룹의 M&A 실무진이 아직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는 기업, 총괄자는 있지만 실무단이 갖춰지지 않은 기업들이 수두룩하다"라며 "도대체 누구를 찾아가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지, 연락을 하더라도 의사 결정력이 있는 사람인지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IB들이 기업을 두루두루 사귀어 놓더라도 그 효과을 언제부터 낼 수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적어도 대선 정국에 들어가는 상반기까지는 IB들의 소득이 많이 않을 것으로 보인다. 대선 이후엔 정권 입맛에 따라 다시 한번 그룹 임원진의 지각변동이 일어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결국 올해 IB들의 '기업 인사 다니기' 행보는 과실을 거두지 못하는 '씨뿌리기'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