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태펀드에 길들여진 벤처 생태계…'일자리 길잡이' 될 수 있을까
입력 17.05.18 07:00|수정 17.05.19 15:26
정부, 20여년간 벤처 육성 명목으로 200조 가까이 풀어
벤처가 키운 기업 중 시총 5위권 기업 韓 0% vs 美 60%
단순 출자 확대로는 고용 효과 미미…"벤처 생태계 조성 선행돼야"
  • 일자리 창출을 제1 과제로 내세운 문재인 정부는 중소·벤처업계 역할에 주목하고 있다. 예산 확대 등을 예고해 벤처업계에도 온기가 감지된다. 하지만 무턱대고 예산을 확충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란 지적도 나온다. 모태펀드 등 정부 자금에 길들여진 벤처투자 업계의 구조적인 문제 해결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 입맛에 맞춘 벤처 투자는 한국판 넷플릭스를 만들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전망들이 나온다.

    새 정부는 중소·벤처기업 육성을 강조하고 있다. 일자리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4차 산업혁명도 대비해 신정장 동력을 마련한다는 의도다. 구체적으로 벤처 정책을 담당하는 주무 부처인 중소기업청을 '중소벤처기업부'로 확대·신설할 전망이다. 관련 예산도 확대해 모태펀드와 창업지원펀드, 엔젤 매칭펀드로 대표되는 벤처펀드 자금줄도 넓힌다.

    일단 벤처·스타트업 업계는 환영하는 분위기다. 모태펀드를 비롯한 정부의 출자금 규모 자체가 늘어나 '투자' 자체가 늘어날 것이란 평가다. 벤처캐피탈 업체는 운용 펀드 규모를 불리고, 중소·벤처기업은 보다 많은 투자 유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정부로선 창업붐으로 제2의 카카오를 키워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고용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모태펀드를 운용하는 한국벤처투자 관계자는 "모태펀드 출자금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중기청은 신규 출자금보단 회수한 투자금을 재출자 하고 있다"며 "예산이 늘면 전체 출자규모가 늘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우려의 시각도 적지 않다. 지금껏 예산이 부족해 벤처 문화가 자리잡지 못한 것이 아니란 분석이다. 오히려 자금줄을 쥐고 있는 정부가 한국 벤처투자 시장을 공공 자금에 길들여진 현재의 '관찰자적 투자자'로 만들었다는 쓴소리가 나온다. 펀딩부터 투자까지 전 단계에 걸친 왜곡된 구조를 개선해야 에어비앤비와 그루폰을 키워낸 실리콘밸리의 세콰이어(Sequoia)·NEA 같은 투자자가 나올 수 있다는 설명이다.

    정부도 할 말은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도 벤처 투자가 생소했던 한국 시장 상황을 감안하면 정부가 나서서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한 벤처캐피탈 업체 대표는 "1997년 DJ 정부가 벤처기업 특별법을 만든 후 벤처 투자라는 개념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고, 2005년 모태펀드가 출범한 후에 비로소 제대로 된 투자가 이뤄지기 시작했다"며 "당시엔 정부가 나서야 펀드라도 만들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문제는 모태펀드를 위시한 정부 자금에 대한 벤처투자 업계의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졌다는 점이다. 실제 국내 벤처캐피탈 업체가 조성한 신규펀드 가운데 절반 정도는 정부 자금이 담당하고 있다. 민간 자금이 투입된 펀드보단 정부 자금이 만든 펀드가 많은 셈이다. 미국과 유럽의 민간 자금 비중은 2015년 기준 각각 88%, 79%였다.

    다른 벤처캐피탈 업체 대표는 "(모태펀드가) 지난 10여년 동안 자금줄 역할을 도맡아 왔고, 모태펀드 출자 없인 한국벤처투자조합(KVF)을 결성하지 못하는 등의 규제로 인해 의존도가 커진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최근엔 금융위원회 산하 성장사다리펀드나 각종 연기금·공제회도 벤처투자 출자에 나서고 있지만, 모태펀드의 자펀드를 운용했다는 이력이 운용사 선정의 주요한 요소로 활용되고 있다. 모태펀드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정부 자금에 대한 의존도는 획일적이고 소극적인 투자 문화를 만들었다. 특정 산업 등을 키운다는 식의 정책적 목적에 부합하는 소규모 출자분야가 줄을 이었다. 국민의 세금을 활용한다는 '원죄(?)' 의식이 작용한 결과다. 당장 수익이 나오지 않더라도 성장성이 보이는 업체를 발굴하거나 모바일 서비스·바이오 등 특정 전문 분야에 매진하는 벤처캐피탈 업체를 찾아보기 힘들어진 배경이다.

    한 벤처업계 관계자는 "농수산펀드나 관광펀드처럼 투자할 업체가 거의 없는 데도 '정책성 목적'을 위해 마련되는 분야가 많다"며 "소규모 출자가 많다 보니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투자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세금이기에 어쩔 수 없다는 정부의 입장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라고 언급했다.

    소액을 프리IPO가 예상되는, 당연히 수익이 날 법한 후기 단계 기업에 투자한 후 수익을 거두는 식의 관찰자형 투자는 이제 업계 관행처럼 굳어졌다. 운용사 선정 사업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위해 수익률 방어가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됐다. 다른 벤처업계 관계자는 "쉬운 투자 혹은 소규모 투자로 손실을 최소화하다보니 성과보수 보단 관리보수 늘리는 데 집중하게 됐다"며 "펀드를 늘리기 위해 정부 입맛에 맞는 투자에만 집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단순히 벤처 출자 예산만 늘린다면 "모태펀드는 벤처 생태계를 흐리는 미꾸라지가 될 뿐"이란 경고의 목소리가 나온다. 고용 효과를 내기 위해선 초기 스타트업이 중견 벤처기업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쉽지 않을 것이란 시각이다.

    한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는 "지난 20년간 정부는 창업기업지원·신성장기반·모태펀드 출자 등 다양한 꼬리표를 붙여 200조원이 넘는 벤처 지원금을 투입했다"며 "시가총액 5위권 내 기업 가운데 벤처투자가 키운 기업의 비중이 0%인 게 그 결과"라고 꼬집었다.

    해결방안으로는 모태펀드의 세분화된 출자분야를 통합하는 안이 거론된다. 소규모 목적성 펀드가 아닌, 대규모 블라인드 펀드로 출자분야를 넓혀 벤처캐피탈 업체가 장기적인 투자 철학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장 영업실적이 나진 않지만 성장성이 충분한 기업에 지속적인 투자를 집행할 수 있다.

    다른 벤처투자 업계 관계자는 "정부 눈칫밥을 덜 볼 수 있게만 해줘도 제대로 된 벤처 투자가 이뤄질 수 있다"며 "장기적으론 민간에 제2의 펀드 오브 펀드 운용을 맡기는 방안도 고려해봄 직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