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만 있고 책임은 서로 미루기...점입가경 CERCG 사태
입력 18.06.07 07:00|수정 18.06.08 09:39
'신용등급'에 대한 증권사-신평사 온도차
채권 평가 '신뢰성'에 대한 의문
증권사-신평사 '리스크 관리' 허점 드러나
  • 중국국저에너지화공집단(CERCG)가 지급보증한 자회사의 회사채 부도로 '크로스디폴트'(Cross Default, 동반채무불이행) 사태가 일어난 가운데 등급을 매긴 신용평가사와 해당 딜을 주선한 증권사, 그리고 셀다운(sell-down, 재매각) 받은 증권사들의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다.

    리테일(소매)에서만 460억원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했지만, 정작 거래 당사자들은 '우리는 문제가 없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란다'면서도 각론으로 들어가면 슬며시 다른 당사자에게 책임을 미루는 모양새다.

    해당 크로스디폴트는 앞서 CERCG가 지급보증한 CERCG오버시즈캐피탈의 3억5000만달러(약 3747억원) 규모 달러표시 채권이 부도가 나면서 시작됐다. CERCG가 해당 회사채에 대한 지급보증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한화투자증권과 이베스트투자증권이 금융주선을 맡은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까지 동반채무불이행 위험이 생긴 것이다.

    한화투자증권과 이베스트투자증권은 CERCG가 지급보증한 CERCG캐피탈의 1억5000만달러(약 1606억원) 규모의 달러표시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한 ABCP의 발행과 판매를 주선했다. 셀다운 방식으로 현대차투자증권은 500억원, BNK투자증권은 200억원, KB증권은 200억원, 유안타증권은 150억원, 신영증권은 100억원을 ABCP에 투자한 상황이다.

    이번 거래의 원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미래에셋대우의 거래 수임(sourcing)에 닿게 된다. 다만 국내에 상품을 공급하는 과정에서 미래에셋대우는 발을 뺐고, 결과적으로는 부실상품 판매 위기에서 벗어났다.

    CERCG가 지급보증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피해가 불가피해진 증권사들은 "신용평가사의 등급을 믿고 투자했다"는 입장이고, 해당 ABCP에 신용등급을 부여한 신용평가사들은 "상품의 리스크 관리는 증권사의 능력인데 화살을 신평사로 돌리는 건 이해가 안 된다"고 반박하고 있다.

    NICE신용평가는 지난 3월13일에 CERCG에 A(미공시등급)를 부여한 게 알려지며 질타를 받았다. 미공시등급은 신평사가 특별한 사유에 의해 신용등급이 필요해 등급평정을 요청한 특정의 투자자들이나 기업에게 신용등급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고객의 요청에 따라 공시를 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이번 크로스디폴트가 발생하자 해당 미공시등급이 공개가 됐고, 신평사와 증권사의 책임소지 논쟁이 더욱 점화됐다.

    한 신평사 관계자는 "신용평가는 투자자들의 리스크 관리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며, 신용등급은 참고사항이지 절대적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고객들도 숙지하고 있을 것"이라며 "등급을 부여한 유동화 상품에 크로스디폴트가 발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공시등급이 유출되는 등 계약이 깨지고, 모든 책임소지를 신평사에게 돌리는 것은 억지"라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채권 평가의 신뢰성을 어디에 둬야 하느냐'는 의문도 제기된다. NICE신용평가와 서울신용평가는 해당 ABCP에 A2 등급을 부여한 상황. 일각에서는 이 같은 신용등급 평가가 참고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면 채권 평가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냐고 지적했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유동화 상품을 만들거나 셀다운 받을 때 신평사의 등급을 기본적으로 신뢰하면서 딜을 진행한다"며 "이번 사태는 신평사의 채권 등급 평가에 대한 신뢰성에 흠집이 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금융권 일각에서는 이번 CERCG 크로스디폴트 사태를 계기로 증권업계에서 전반적으로 해외 자산 투자와 관련한 리스크 관리 가이드라인을 마련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신용등급을 매긴 신평사도, 유동화 및 판매를 맡은 주선사도 결과적으로 CERCG 지급 능력과 문제점에 대해 면밀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책임을 다하지 못한 셈"이라며 "이번 사태로 리스크 관리의 소홀함이 드러난 만큼 신평사와 증권사는 실사를 더 철저히 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각도의 리스크 관리 능력을 함양해야 비슷한 사태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화투자증권과 NICE신용평가 등은 4~5일 이틀 일정으로 함께 CERCG 중국 본사에 방문해 사태 해결을 모색했다.

    중국 본사 방문에 참여한 한 기관의 관계자는 "에너지기업 특성상 투자를 많이 하다보니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막혔다는 게 CERCG 측의 설명이고, 원자재 조달 및 생산에는 문제가 없었다"며 "국내 발행 ABCP의 만기일은 11월9일로 아직 채무불이행이 발생하지 않았고, CERCG 측이 사태 해결에 대한 의지가 있어 지켜볼 예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