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주 이어 서정진까지…재계에 부는 패밀리오피스 바람
입력 19.01.22 07:00|수정 19.01.23 14:00
패밀리오피스, 미국과 유럽에선 19세기부터 시작
소유와 경영 분리 목소리 커지며 국내에도 패밀리오피스 바람
성장성 높은 해외에 지분투자 형태로 운영
재벌오너들도 지주사 활용해 투자활동에 더욱 집중할 듯
  • 김정주 넥슨 회장에 이어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까지 경영에 손을 놓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궁극적으론 투자를 중심으로 하는 ‘패밀리오피스’를 운영할 것으로 보인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라는 사회적 요구가 거세지면서 재계에 패밀리오피스 바람이 거세질 것이란 관측이다.

    패밀리오피스(family office)는 19세기 로스차일드 가문이 막대한 재산을 굴리기 위해 집사를 대리인으로 세워 관리토록 한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정부의 간섭을 피하고 자금운용의 추적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다. 이후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 가문이 패밀리오피스를 세워 이를 공식화했다. 케네디, 빌게이츠 등 유명 가문은 모두 패밀리오피스를 보유하고 있다.

    비단 미국,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이런 모델을 흔히 찾을 수 있다. 싱가포르에 상장된 세계최대의 팜오일 생산회사인 윌마(Wilmar International)도 패밀리오피스를 운영한다. 이를 위해 지난 2015년에는 골드만삭스 동남아시아 투자부문 대표를 영입하기도 했다.

    국내에선 ‘1조 거부’라 불리는 이민주 에이티넘 회장을 시작으로 패밀리오피스가 본격화했다. 그는 1975년 봉제인형회사를 차려 종잣돈을 마련한 후 외환위기 때 케이블 회사를 인수했고, 이후 이를 1조원에 매각하며 거부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전문투자가로 변신해 해외자원투자를 단행하는 에이티넘파트너스와 에이티넘에너지를 만들었다. 사실상 개인회사로 투자를 전문적으로 하는 한국형 패밀리오피스다.

    최근엔 김정주 넥슨 회장도 넥슨 매각 의사를 드러내며 본격적인 투자자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김 회장은 유럽 내 투자회사인 NXMH를 기반으로 명품 유모차인 ‘스토케’와 레고 거래 사이트인 ‘블랙 링크’를 인수했다. 넥슨 지분을 판 자금을 활용해 보다 적극적으로 해외 투자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서정진 회장도 이런 흐름에 동참했다. 서 회장은 지난 4일 2020년에 은퇴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서 전문경영인에 회사를 맡기고, 본인은 미래 먹거리를 위한 투자 활동에 나서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들뿐 아니라 창업의 길을 가겠다는 이웅렬 코오롱 회장을 비롯해 M&A로 큰 돈을 손에 쥔 이상록 전 카버코리아 회장, 김준일 전 락앤락 회장 등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주요 대기업 오너들도 지주회사를 활용해 패밀리오피스와 유사한 형태의 투자활동을 확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SK그룹의 행보가 눈에 띈다. 장동현 SK㈜ 대표는 투자형 지주회사로 진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여기에는 오너인 최태원 회장의 의중이 담긴 것으로 보인다. SK㈜는 바이오·제약·의류사업까지 다양한 분야에 손을 뻗고 있다. 다른 주요 재벌기업들도 지주사를 활용한 투자에 적극 나설 것으로 보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지주회사가 패밀리오피스화 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재계에 패밀리오피스 바람이 거세지는 이유는 우선 달라진 사회 분위기가 꼽힌다. 소유와 경영을 분리하라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진데다, 경영참여에 따른 리스크가 커졌다. 상당수의 재계 총수들이 검찰수사를 받은 경험이 있다 보니 규제당국과의 마찰을 피하려는 성향이 강해졌다. 직접 사업에 뛰어들기 보다 투자활동으로 자신의 주 무대를 바꾸고 있다.

    더불어 오너의 역할도 이전과 달라졌다. 글로벌 비즈니스 환경이 바뀌면서 연구개발을 통한 성장으로는 빠르게 변하는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 가기 힘들어졌다. 과감한 M&A와 투자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단 의미다. 여기에다 국내 경제 성장률이 낮아지면서 성장성이 높은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하는 상황이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운영하는 ‘비전펀드’가 국내 재벌 오너들의 생각에도 많은 영향을 줬다. 손 회장은 100조원 규모의 펀드를 결성해 미래 기술력을 지닌 회사에 적극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새롭게 사업을 시작하는 것보단 똘똘한 기업에 투자하는 게 ‘부의 증식’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이 국내 오너들 사이에서도 강해졌다.

    다만 모든 패밀리오피스가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민주 에이티넘 회장만 하더라도 미국 셰일가스 광업 개발권 지분 확보를 위해 5000억원가량을 투자했지만 투자실패로 큰 손실을 봤다. 그만큼 투자영역도 사업 못지 않게 어렵고 이로 인해 막대한 자산이 줄어드는 일은 흔한 일이다.

    한국형 패밀리오피스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유능한 인재가 없는 점도 꼽힌다. 제 값을 주고 유능한 인재를 데려와야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오너들이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서구의 패밀리오피스가 수세기를 거치며 진화하면서 개인재산을 관리하는 ‘집사’ 영입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한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아직까진 오너가 신뢰하는 몇몇 사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다 보니 투자분야 인재확보에는 소극적인 경향이 있다“라며 “이들이 적극적으로 인재 유치에 나선다면 투자업계에서도 인력이동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