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 그들의 집안 싸움에는 관심이 없다. 조양호 선대 회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유훈을 남겼는지도 그들만이 알 일이다. 대한항공과 한진그룹 투자자들에게는 사업이 안정적인지, 각 계열사 비전이 얼마나 긍정적인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포인트다.
그럼에도 불구, 조현아 전 부사장의 ‘성명’ 발표로 한진그룹 경영권 분쟁이 재점화됐다. 여기에 이명희 정석기업 고문과 조원태 회장간 불화까지 더해지면서 '집안싸움'은 '지분경쟁'으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인다.
관심사는 이로 인해 한진그룹의 미래가 어떻게 변할것인가 하는 점이다. 경영권 분쟁이 본격 부각되면서 주가는 폭등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가와 별개로 회사 상황은 한 치 앞을 못보게 됐다.
그간 ‘야인’으로 존재하던 조 전 부사장이 깜짝 등장할때, ‘한진그룹의 변화를 이끌어 낼 기막힌 방안이 담겨있을까’ 찾아봤지만 역시나 욕심이었다. 조 전 부사장의 성명은 그룹의 미래를 걱정하는 주주의 입장이라기보단, 경영에 복귀하지 못한 오너 일가 개인의 분풀이에 불과했다.
조 전 부사장과 법률대리인(법무법인 원; 강금실·윤기원 대표변호사) 측은 “한진그룹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향후 다양한 주주들의 의견을 듣고 협의를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성명만 보면 주주와 투자자들은 고려 대상이 아닌듯 했다.
결국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수단’, ‘일부 주주들과 접촉해 경영에 참여하려는 의도’ 등 추측이 난무하며 시장의 혼란만 야기했다.
집안싸움에서 특정 오너가 '정당성'을 얻으려면 ▲한진그룹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위해 본인이 ‘왜’ 등장했어야 하는지, ▲주주들이 ‘왜’ 본인을 지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이 나와야 한다. 게다가 이들은 모두 전횡과 물의를 일으켜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이로써 한진그룹 지배구조와 경영 개선 요구의 도화선에 불지핀 장본인이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한진그룹을 이끌겠다'라는 비전을 제시한 점은 찾아보기어렵다.
아이러니하게 한진칼의 주가는 과거 10년과 비교해 최고 수준이다. KCGI·반도건설 등 예상치 못한 주주들이 등장할 때마다 주가는 널뛰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의 지분 경쟁은 결국 '영역권 혹은 밥그릇 싸움'에 불과하게 됐다. 누가 얼만큼의 지분을 갖고 있는가 또는 후대의 패권은 누가 쥐게 될 것인가에 이제 모든 관심이 모일 전망이다. 주요 임원들이 소위 줄서기를 하는 동안 실무자들의 피로도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한진그룹의 변화를 기대했던 투자자들의 기대감도 사그라질 가능성이 크다. .
이 와중에 대한항공은 악화된 경영환경에 허덕인다. 실적은 꺾였고 내년 전망도 밝지만은 않다.
KCGI의 등장으로 한진그룹의 체질이 바뀔 것이란 기대도 이미 꺾였다. KCGI 주주제안의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앞으로 그룹 쇄신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오히려 지금은 KCGI가 언제,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투자금회수(엑시트)에 나설 것인지가 더 큰 관심사가 돼버렸다.
다른 그룹의 오너 일가간, 혹은 헤지펀드의 경영권 분쟁도 지금 한진그룹 일가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결국 집안싸움이었지만 신동주 SDJ코퍼레이션 회장이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경영권 분쟁을 벌일 때는 후계자로서 정통성을 강조하며 현 경영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내 유일의 자동차 메이커 현대차그룹을 괴롭혔던(?) 미국 헤지펀드 운용사 엘리엇매니지먼트(Elliot management)도 그들만의 정체성이 있었다. 시세차익을 노리고 자금을 쏟아붓는다는 오명을 쓰긴 했지만, 결과적으론 현대차의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 냈다.
지금 한진그룹 집안싸움에는 그 점이 빠져있다. 오로지 "누가 지분을 더 많이 갖고 있느냐"만 부각된다. 피해는 회사와 임직원들, 그리고 투자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게다가 국민연금을 비롯한 글로벌 인베스터들은 환경과 사회·지배구조 등 ESG 투자에 대한 중요성이 점차 강조하고 있다. 한진그룹은 수년 째 국내 기업 가운데 가장 취약하고 불안정한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못했다. 끊임없는 집안 싸움은 한진그룹에 대한 글로벌 투자자들의 투자심리를 얼어붙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미 채권시장을 중심으로 대한항공에 대한 투자 경고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집안싸움의 당사자들은 한진칼과 대한항공이 본인들만의 회사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할 때가 됐다.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19년 12월 27일 07:00 게재 ㆍ12월29일 16:00 업데이트]
한진그룹의 집안싸움에 '비전경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