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뒷짐지고 지켜만 보는 국민연금·국토부
입력 20.02.18 07:00|수정 20.02.19 10:05
  • 한진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현재로선 당사자인 오너일가, KCGI 그리고 투자자들만의 이야기다. 올해도 캐스팅보트 역할을 할 국민연금은 주주권행사와 관련해 애매모호한 입장만 내놨다. 항공산업의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는 ‘대한항공’의 대주주 변경 문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물론 정부가 사기업의 경영권과 관련해 ‘감놔라 배놔라’하는 모양새를 연출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기간산업, 특히 승객의 안전과 직결된 항공업이란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최소한의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의 경우, 주식을 보유한 기업에 대해 의결권 행사를 논의하는 기구인 ‘수탁자책임위원회’는 아직 출범조차 하지 못했다. 한진칼과 대한항공을 비롯해 대부분의 기업들이 주주총회를 여는 ‘3월 슈퍼 주총 데이’는 불과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

    지난 5일 국민연금 기금운용회의에선 개별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여부에 대해 논의도 되지 않았다. 기금위원 3분의 1이 동의하면 다음에 열릴 기금위에서 문제기업에 대해 의결권 행사 여부를 결정한다는 결론만 도출했다. 이날 조흥식 기금위 부위원장은 “한진칼 경영권 분쟁은 관심이 큰 사안이므로 국민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으면 한다”는 애매한 입장만을 내며 논란만 더 키웠다.

    2년전인 2018년,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경영진 일가의 일탈행위 의혹이 불거지자 ‘기업 평판이 악화해 국민연금의 장기 수익성을 저해할 가능성이 크다’며 공개서한을 보내 경영진 면담을 추진하고 지속적인 경영개선을 요구했다. 이 같은 주주권행사는 지난해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회장에 대한 ‘재신임 반대’ 표결로 이어졌고, 그 결과 조 회장을 경영진에서 끌어내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년이 지난 현재, 대한항공의 상황은 더 나아지지 않았다. 대외환경이 변화한 탓도 컸지만 실적이 크게 꺾였다. 악재가 겹치면서 지난해보다 올해가 더 나아질 것이란 긍정적인 신호도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연금 투자 자산의 잠재적 손실도 예상해 볼 수 있다. 국민연금이 2대주주인 대한항공(지분율11%)의 주가는 10년새 최저점에 도달했다. 주요주주인 한진칼(지분율 3.45%)은 경영권 분쟁을 겪으면서 양측의 공방속에 평판 리스크를 고스란히 노출했다. 비정상적으로 치솟은 주가는 내리막을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올해 한진그룹에 대한 제대로된 입장조차 내지 못했다.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전문위 구성과 의결권 행사와 관련해 “투자자들이 우려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지장이 없도록 준비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부랴부랴 수탁위를 구성해 급하게 의결권 행사 논의에 돌입한다한들, 심도있는 논의가 가능할지 또 신뢰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게 사실이다. 실제로 조흥식 기금위 부위원장은 “문제기업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하기에는 시간적으로 촉박하다”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항공사의 면허 허가, 노선 배분 등과 같은 주요권한을 쥐고 있는 국토부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국토부는 지난해 12월 ‘항공산업 경쟁력 강화방안’을 발표하며 항공사 지배구조와 재무건전성에 대해 관리를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지분 변동 및 대주주 변경과 같은 이슈가 발생해도 사업계획이 충실히 이행하고 경영안정성을 확보하도록 하는게 주요 내용이다.

    한진칼에 대해선 이같은 방안이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국토부 관계자는 한진칼의 대주주 변경 가능성에 대해 “(대한항공 관련 사안이 아닌) 항공사 주주의 윗단에 있는 주주인 한진칼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제재 등과 관련해서는) 고민하고 있지 않다”며 “(항공사 건전성 관리 강화에 대해)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 된 것은 없지만, 한진칼 경영권과 관련해선 너무 많이 나간 내용인 것 같다”고 말했다.

    항공법상으로 따지면 틀린말은 아니다. 항공사업법(제 9조)과 항공안전법(제 10조)은 항공사의 대주주 요건에 관해서만 제한하고 있을뿐, 모회사를 비롯한 지배회사의 대주주 요건에 대해선 규제하지 않는다. 결국 국토부의 입장은 한진칼의 경영권이 어느쪽으로 향하든 대한항공의 대주주가 ‘한진칼’인 이상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한진칼, 즉 대한항공 지배회사의 대주주 변경은 대한항공 경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대한항공의 임직원은 2만여명, 대주주인 한진칼의 임직원은 총 32명이다. 사실상 대한항공이 그룹의 몸체다. KCGI 또한 한진칼의 경영권을 확보해 대한항공을 경영하겠다는 의도다. 결국 한진칼의 경영권 분쟁은 대한항공 경영권 분쟁으로봐도 무리가 없다.

    항공업계 한 관계자는 “항공사에 미치는 국토부의 영향력은 상상이상으로 크다”며 “한진칼 경영권 분쟁에 관해서 지금은 관망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언제든 지배구조·재무상태·운영현황 등을 이유로 어떠한 방식으로든 컨트롤 할 수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누가 되던지) 한진칼 대주주 입장에서는 눈치를 볼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시장논리에 맡겨놓은 한진칼의 경영권 분쟁의 피해는 투자자들과 소비자들에게 돌아가게 된다.

    한진그룹은 앞으로도 경영권 리스크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조원태 회장, 조현아 전 부사장(KCGI) 어느쪽이든 이번 주총은 반쪽짜리 승리를 거둘 것이다.  최고 의사결정권자의 경영권은 불안할 수밖에 없고, 임직원들도 마음놓고 일할 수 있는 상황이 당분간 조성되기 어렵다.  대한항공은 전 세계에 평판리스크를 노출했고, 유무형의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자본시장에서의 입지가 줄어들 여지도 크다. 부채비율을 비롯한 재무상태의 경고등이 이미 켜진상태에서 대주주 변경 등으로 신용등급의 재검토에 돌입하면 지금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몰릴 수 있다.

    대한항공 조종사 노동조합은 현재 필수공익사업장 지정을 해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최근엔 국내 8곳의 조종사 노동조합은 연맹을 결성해 협상력을 키웠다. 필수공익사업장 지정이 해제되면 임직원들의 ‘전면파업’이 가능해진다.

    대한항공 일반노조는 이미 조현아 전 부사장의 복귀에 반대하며 일단 조원태 회장의 편에 섰다. 한진그룹 경영권 향방에 따라 어떤 방식으로든 임직원들의 반발도 예상할 수 있다. 이는 곧 대한항공 경영의 불안정성, 노사 갈등의 잠재적 리스크가 소비자들의 안전 문제와 직결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