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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보잉의 데니스 뮐렌버그는 최고경영자(CEO) 자리에서 물러났다. 보잉 737맥스 여객기가 잇따라 추락하며 다수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뮐렌버그는 이사회 의장에서 물러난 뒤 CEO 직위는 유지한 채 737맥스를 살리고자 업계 인사를 설득했지만, 미 연방항공청(FAA)과의 관계만 악화됐다. 이사회는 뮐렌버그를 CEO 자리에서도 경질했다.
미국의 대표 캐주얼 기업 갭그룹의 CEO 아트 펙도 전격 해임됐다. 좀처럼 개선되지 않는 실적이 발목을 잡았다. 갭 주식은 아트 펙 취임 이래 50%나 떨어졌지만 퇴임 발표 때는 7%만 떨어졌다. 월스트리트에 ‘테크버블’을 불렀던 위워크는 기업가치 폭락, 뉴욕 증시 상장 연기 등 악재 속에서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설에 오른 공동창업자 아담 노이만이 CEO에서 물러났다. 최대 투자자였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뉴먼 지지를 철회하고 사퇴를 압박한 것이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다.
2019년은 미국 CEO들에게 유난히 잔인한 한 해였다. 주주들의 이사회 압박,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문제가 있는 CEO의 사퇴. 이런 광경을 한국 기업들에서도 볼 수 있을까.
승계를 통한 부의 이전이 이뤄지는, 재벌기업이 다수인 특수성이 있어 당장은 극적인 장면을 기대하긴 어렵겠지만 개연성은 점차 커지고 있다. ‘착한 기업’을 요구하는 투자자들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고 이사회 의장과 CEO 중 택일하는 오너 경영인들이 하나둘 늘어나며 소유와 경영의 분리 움직임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올해 주주총회는 예고편이 될 가능성이 커보인다. 경영권 승계 및 분쟁, 오너 경영인들의 사내이사 재선임, 사외이사 임기 제한,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 활동 강화, 국민연금의 의결권 위임, 전자투표제 도입, 행동주의 펀드 등 안팎으로 감안해야 할 사안들이 많다. 과거처럼 뻔한 안건의 뻔한 결과는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와 기대감이 공존하는 상황이다.
우선 4대그룹을 보면 역시 삼성이 가장 주목된다. 주요 안건은 이사회 구성이다.
이상훈 삼성전자 의장은 지난해 12월 자회사의 '노조와해 공작'에 개입한 혐의로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아 법정에서 구속됐고 지난 14일 자진 사임했다. 항소를 했고 시간이 촉박하다는 이유로 체제 유지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결국 부담 최소화를 선택했다. 공석으로 둘 수는 없어 기존 이사진에서 선출할 가능성이 크다는 평가다. 현재 거론되는 의장 후보로는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과 박재완 사외이사다. 김기남 부회장이 사내 영형력이 크지만 이사회 독립성 강화 트렌드에 벗어난다. 박재완 전 장관은 사외이사 재선임 당시 독립성 부족을 이유로 외국 연기금들이 반대 의견을 낸 바 있다.
계열사들은 대규모 사외이사를 교체해야 하는 상황이다. 삼성SDI 4명, 삼성SDS 3명, 삼성전기 2명, 삼성물산 2명, 삼성카드 1명, 삼성중공업 1명 등 총 6개 계열사 13명이다. 이와 별개로 참여연대는 삼성물산 이사들이 회사 및 주주에 현저한 손해를 끼치며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찬성표를 던진 최치훈 의장과 이영호 사장 등 이사진이 교체돼야 한다고 주장한 상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그룹 계열사 지분을 모두 처분한 것으로 알려져 상대적으로 조용한 주총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시장에선 주총 직전부터 게임이 끝났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그룹 상장사들은 모두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며 주주친화 강화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정의선 부회장의 현대모비스 사내이사 재선임은 무난하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21년간 현대차 대표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는 정몽구 회장의 현대차 사내이사 임기는 종료된다. 정몽구 회장이 연임하지 않기로 한터라 이제 본격적인 ‘정의선 시대’가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LG그룹은 수장들의 교체가 최대 안건이다. 박진수 LG화학 이사회 의장은 최근 자신이 보유한 LG화학 보통주 전량을 매도했다. 이에 이번 주총에서 물러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미 안팎에선 박 의장 후임으로 권영수 LG 부회장이 임명될 것이라는 하마평이 나오고 있다. 권 부회장이 LG화학 이사회 의장이 되면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유플러스 등 그룹 핵심 계열사 의장을 모두 겸직하게 된다. LG전자는 6년만에 원톱 체제 전환 가능성이 거론된다. 권봉석 사장이 이번 주총에서 신규 사내이사로 선출될 예정이다. 앞서 각자 대표를 맡았던 조성진 부회장과 정도현 사장이 동반 퇴진했다.
SK그룹은 사명 변경 추진이 눈에 띈다. 변경이 추진되는 계열사는 SK텔레콤, SK종합화학, SK인천석유화학, SK브로드밴드 등으로 알려졌다. 개별 계열사의 다양한 사업확장의 가능성을 열어 두기 위한 목적과 동시에 중간지주사 전환을 위한 명분을 만들 필요도 작용했단 평가다. 롤모델은 SK이노베이션이다.
주제 측면에서 가장 큰 관심을 받을 사안은 역시 오너 경영인들의 사내이사 재선임 이슈다. 대신지배구조연구소에 따르면 자산총액 기준 주요 30대 대기업집단 소속 상장기업 192개사 중 3월 임기 만료를 앞둔 오너 일가는 23명에 달한다. 그룹별로 효성그룹 4건, 현대차·하림·세아그룹 3건, 현대백화점·롯데·GS·SM그룹 2건, 대림·영풍·삼성·두산·SK·LS·한국금융지주·카카오 1건씩이다.
경영권 분쟁을 겪고 있는 한진칼은 조원태 회장의 임기가 곧 만료될 예정이고 주총에서 재선임 안건이 상정될 예정이다. 조현아-KCGI-반도건설 등은 조원태 회장을 대신할 전문경영인으로 김신배 전 SK그룹 부회장을 제안했다. 한 때 한진칼 주식 10% 이상을 보유하고 있던 국민연금은 최근 3%대 안팎으로 크게 줄여 주총에서 목소리를 낼 가능성은 줄었다.
법령 위반 등 사회적 이슈가 있는 사내이사들은 재선임이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들이 나오면서 주목받는 그룹들은 롯데, 대림이다.
롯데그룹은 지난해 2월 신동빈 회장이 일본 롯데홀딩스 대표이사로 취임하고 6월 열린 롯데홀딩스 정기 주주총회에서 이사로 재선임되면서 일단 그룹 지배력 측면에서 신 회장의 입지가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국내에선 국정농단 사건과 관련해 집행유예를 받으며 법적 리스크에 노출됐다. 최근 롯데건설 사내이사직을 내려놓으며 “재편 결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미 신 회장은 국민연금으로부터 과도한 겸임을 이유로 롯데케미칼, 롯데칠성음료, 롯데쇼핑의 재선임을 반대 받은 바 있다. 법적 논란을 짊어진 상황에서 신 회장은 롯데지주와 롯데쇼핑, 롯데제과의 등기임원 일괄 만료 시기를 맞게 됐다.
대림산업의 경우 이해욱 회장의 사내이사 재선임건이 이번 주총에서 통과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분석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이 회장은 현재 사익편취 행위와 관련해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앞서 ‘갑질’ 논란으로 여론이 악화하자 이사회를 통해 대표이사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대림산업 지분 약 12%를 보유한 국민연금이 이해욱 회장의 이사 연임 안건에 반대해야 한다는 여론의 압력도 높아지고 있다.
기업의 권력 구조 재편은 전세계적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과거 CEO 중심의 권력구조가 점차 구성원과 주주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 특히 경영진에 대해 윤리적 기준이 강화되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환경(Environmental)·사회(Social)·지배구조(Governance)를 앞세워 기업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ESG 투자에 대한 논란은 끊이질 않고 있다. 투자 기준은 제각각이고 기업가치 평가 측면에서 계량화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도 결론은 명확하다. 어떤 의미에서든 ‘좋은 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사회 다양성, 승계 측면에서 약점을 갖고 있는 한국 기업들은 언제든지 제2, 제3의 엘리엇의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기업 지배구조 관련 전문가는 "과거 우리나라 주총 이슈는 거버넌스, 그 중에서도 승계나 이사 선임과 같은 일부에만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다"며 "자본시장이 성숙하면서 환경과 사회까지도 막론하는, 다양한 주주제안을 포괄하는 기업들만 시장에서 인정받는 단계가 오고 있다"고 말했다.
좋든 싫든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방향성은 정해졌다. 이사회와 CEO는 분리되고 있고 이사진 구성에서 여성, 외국인, 소비자 등 다양성을 갖춰야 한다. 국민연금을 위시한 기관투자가들은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투자 성격을 바꾸며 목소리를 크게 낼 것이고 외국인 투자자들도 동참할 가능성이 크다. 전자투표제 도입으로 소액주주들의 목소리 역시 과거에 비해 커질 것이다. 기업은 실적을, 주가를, 배당을 더 신경써야 할테고 비윤리적 행동을 한 경영진은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워질 것이다. 경영권을 둘러싼 주주와 경영진, 투자자 간의 갈등도 한층 커질 수밖에 없다. 한국 기업의 주주총회도 이제 매년 골라보는 재미가 있는 이벤트가 돼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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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02월 18일 07:00 게재]
달라진 주총, 미국처럼 CEO보다 '주주'
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 활동 강화
경영진 윤리 기준 강화 '착한 기업' 요구
사회·환경 막론 '글로벌 스탠더드' 가닥
삼성 '이사회 구성', LG '수장 교체'
한진칼 '경영권 분쟁' 등 주요 안건
기관투자가의 수탁자 책임 활동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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