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항공 지원책에 업계는 무용론, 시장은 무력감
입력 20.03.23 07:00|수정 20.03.24 10:21
  • #1. “개별 기업당 몇십억원에서 몇백억원 수준의 금융지원으로는 어림없다. 기업당 한 달 필요 유동성만 최소 500억원이다. 총 3000억원을 LCC 6곳이 나누는 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한 곳당 3000억원도 부족하다.” (항공사 관계자)

    #2. “모두가 위기지만 우리 섹터만큼은 확실하게 위기가 왔다. 곧 디폴트에 임박할 항공사들이 수두룩하다. LCC도 문제지만 FSC들마저 신용 위기에 처하게 되면 항공업발(發) 금융위기도 무리한 가정이 아니다. 증권사 항공 섹터가 없어질 수도 있다.” (증권사 항공 애널리스트)

    전세계적으로 항공사들의 유동성이 사실상 마비 위기에 직면했다. 항공산업에 대한 구제금융(bailout)을 시작할 조짐까지 보인다. 정부도 유동성이 마른 항공업에 각종 금융지원과 혜택 계획을 내고 있지만, 시장은 산업을 살릴지 죽일지 기로에서 현재의 지원 수준으로는 이도 저도 아닌 ‘무용(無用)’에 가깝다고 말한다.

    정부는 저비용항공사(LCC) 기업들에 최대 3000억원의 금융 지원을 진행 중이지만 항공사들은 ‘턱없이 부족하다’는 반응이다. 18일엔 추가로 항공기 정류료 2개월 면제, 항행 안전시설 사용료 3개월 납부유예, 미사용 운수권 슬롯 회수 전면 유예 등의 지원안을 발표했지만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는다. 항공사들은 미국과 중국, 일본처럼 재산세 등 지방세 면제를 포함한 세제 지원과 긴급 자금지원 규모 확대가 더 절실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항공업만 지원해줄 수 없는 정부와 국책은행도 고심이 깊다. 사실상 모든 금융지원을 책임지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 보니 지원 목적도 항공업 수요 회복이 아닌 일시적인 파산 위기 모면에 가까워 보인다. 어떤 지원도 항공사들을 만족시킬 수 없어 지원해주고도 욕을 먹는 상황이다. 어느 정도로 유동성을 더 공급해줘야 할지도 막막하다.

    전세계 금융권이 공통적으로 항공산업 대출에 꺼리는 상황인 만큼 국내 시중은행도 이들 항공사에 선뜻 지원 의사를 밝힐 수 없는 상황이다. 특히 담보로 잡을 만한 자산이 마땅하지 않은 LCC 기업들에는 사실상 무담보로 대출해줘야 해 향후 지게 될 리스크가 두렵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항공사 중에서도 제주항공과 이스타항공을 대상으로 신디케이트론을 추진 중이지만,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아직 참여 의사를 밝힌 은행은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일단은 당장의 리스크를 국책은행이 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산업은행은 이런 와중 아시아나항공 매각을 성사시켜야 하는 부담감과 함께 향후 대한항공마저 지원을 요구해 올 상황까지 염두에 둬야 한다.

    한때 대체투자로 항공기 투자에 열을 올렸던 증권사들은 이젠 막대한 손실을 우려한다. 돈이 묶인 개인 투자자들은 더욱 막막하다. 항공사 공급과잉으로 위기론이 제기될 때만 해도 언젠간 주가가 오를 거라고 막연한 기대감을 가져왔지만 코로나와 증시 악재까지 겹치며 이젠 기대감마저 갖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최근 금융감독원이 모니터링에 들어간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의 장래매출채권 유동화증권(ABS)은 대부분 기관보다도 개인 투자자들이 유입돼 있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증권사 입장에선 투자 대상을 늘려 리스크 프리미엄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후순위 대출자가 된 기관들을 받쳐줄 우량한 지분 투자자 혹은 대출을 기반으로 한 ABS로 개인에게 리스크를 어느 정도 나눠왔다”라고 말했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ABS는 지난해 2월 대비 매출채권 회수실적이 30% 감소했다.

    증권사 항공 담당 애널리스트들은 항공업의 부진이 급격하게 시작된 지난해에 세웠던 최악의 시장 시나리오들이 점점 맞아 떨어지고 있다며, 바닥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고 보는 분위기다. 한 증권사 항공 담당 애널리스트는 “지금이 바닥이 아니라 더 떨어질 가능성이 커 분석 리포트를 내기도 조심스럽다. 리포트를 낸 지도 꽤 됐다. 지금 상황에서 가정을 내린다는 것 자체가 무리처럼 느껴진다”라고 토로한다.

    한치 앞도 안 보이는 항공사, 어디까지 돈을 부어야 할지 감도 안 오는 정부, 리스크를 껴안고 금융지원에 나설 수밖에 없는 국책은행, 묶인 돈에 발만 구르는 투자자들, 업종이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의 항공 담당 애널리스트들. 이들의 상황은 이젠 모두 ‘무력감’이라는 단어로 귀결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