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금조달 선택지 좁아진 유통기업...대마(大馬)도 예외 없다
입력 20.04.21 07:00|수정 20.04.22 10:45
최근 6주간 유통 대기업들 2.1조 규모 CP 발행
장기물 투자 여력 떨어지며 단기시장으로 내몰려
단기차입금 비중 높아지며 그룹 재무리스크 우려
  • 발행시장 빅이슈어인 롯데쇼핑, 신세계 등 유통 대기업들의 자금조달 선택지가 좁아지고 있다. 회사채 시장이 공백기에 들어간 데다 단기금융시장 경색이 더해지며 기업들의 재무 부담을 키우는 상황이다. 큰 말은 죽지 않는다(대마불사)는 명예만큼은 유지하던 이들 기업들도 예전같지 않은 부정적 시선에 불안감을 호소하는 분위기다.

  • 유통 대기업들은 최근 들어 CP 시장에서 대규모로 자금을 조달하며 단기차입을 늘리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최근 6주간(3월 2일부터 4월 10일) 유통기업들의 CP 발행이 두드러졌다. 롯데지주가 5850억원, 코리아세븐이 5400억원, 롯데쇼핑은 3700억원을 조달했다. 이어 호텔롯데와 GS리테일, 신세계, 현대백화점, 신세계조선호텔도 750억원에서 2250억원 사이 규모로 CP를 발행했다.

    유통기업의 대규모 CP 발행은 별스러운 일은 아니다. 우량한 신용도를 기반으로 회사채 시장을 활발하게 노크해왔지만 업종 특성상 단기금융시장의 자금 조달도 일상적이다. 특히 롯데쇼핑은 지난 2010년엔 CP 잔액이 1조원 이상에 달한 적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초단기물로 구성돼 있다 보니 단기자금시장 경색 시 재무안정성에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대표적으로 롯데지주의 경우 이 기간 20일 이하 초단기물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풍부한 보유현금을 바탕으로 장기조달에 치중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한 증권사 크레딧 연구원은 "그간 장기금리가 단기금리보다 높았지만 최근엔 3개월~1년물이 3년물보다 높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단기물 발행을 늘리고 있다는 것은 결국 장기로는 조달이 쉽지 않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금리 부담도 기업들의 자금조달 선택지를 더욱 좁히고 있다. 코로나 전엔 1% 후반대에 5년, 10년 이상의 장기채를 조달할 수 있었지만 현재는 채권시장안정펀드의 편입 가능성을 감안해 발행 조건(만기 3년 이하)을 맞추거나, 혹은 금리를 더 높여 발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신용등급 강등 위기인 곳도 많다 보니 투자자 입장에선 더 높은 금리를 원할 수 있는 점이 부담이 될 수 있다.

    단기 위주로 조달방식이 치우칠 수밖에 없는 이들 기업을 두고 그룹의 재무 리스크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크다.

    다른 증권사 크레딧 연구원은 "유통기업의 CP 발행이 과거와 다른 점은 장기로 조달이 어려워지면서 어쩔 수 없이 단기로 몰리게 됐다는 데에 있다. 자금 비중이 단기로 치우치는 점도 문제지만 각 기업들이 고려하는 장단기 차입금 비중이 있을텐데 전처럼 마음대로 장기물을 발행할 수 없다는 점은 재무 불확실성을 키울 수 있다"라고 분석했다.

    우량기업들만큼은 아직 위기라고 보긴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크레딧업계 관계자는 "크레딧에선 결국 '대마불사(大馬不死)'란 걸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채안펀드 편입기준인 AA- 이상에 대부분 속하고 있고 투자자 입장에서도 매력이 있어 자금수요도 몰릴 수밖에 없다. 반면 소위 하이일드채권 등의 비우량 기업들은 더욱 자금을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크레딧시장의 양극화'를 초래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고 본다"라고 평가했다.

    다만 코로나 소비불황으로 역대 최악의 실적이 예견되면서 신용등급 강등 위기에 놓인 곳들이 늘었고, '대마(大馬)도 예외는 없을 것'이라는 견해에도 힘이 실린다. 한국기업평가는 최근 호텔롯데(AA)와 호텔신라(AA)를 하향 검토 대상으로 등재했고, 한국신용평가는 호텔신라의 등급전망을 부정적으로 하향했다. 이들 기업은 그간 현금창출력이 안정적이라고 평가 받았지만 적자전환을 피할 수 없을 거란 분석이 잇따라 제기되고 있다.

    기업들도 달라진 상황에 불안감을 호소한다. 당장 코로나 종식 시점을 예측할 수 없는 점도 이들 기업의 불확실성을 더욱 키우고 있다. '대마불사'란 공식을 대입하기에도 무색해진 모습이다.

    한 유통기업 관계자는 "그간 주로 연간 단위로 자금조달 전략을 짰지만 지금 같은 시기에선 한 해 계획이 의미가 없을 수 있다. 바로 몇 달 전 세운 전략도 무의미해질 만큼 대외변수가 산적해 짧게 끊어서 자금을 조달하는 방법이 최선이 됐다. 더욱이 유통업은 고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내수산업인데, 안 좋은 업황에 돈까지 안 돌면 그땐 정말 위기가 될 수도 있다"라고 토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