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 때마다 동네북…국내 신용평가사 위한 변(辯)
입력 20.05.07 07:00|수정 20.05.11 09:34
  • 신용평가사는 위기 상황이 돼서야 주목받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유로존 위기, 그리고 2020년 현재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그렇다. 신용평가사는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에는 '저승사자'일 수 있고, 방향성을 찾지 못하는 투자자들에겐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이럴 때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동네북이 된다. 무디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등 글로벌 신용평가사들과 비교를 당하고 ‘뒷북’ 평가에 원성을 자아낸다. 국내 신용평가사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억울한 면이 있다. 올해 남은 기간 신용평가사들은 끊임없이 언급될 상황이다.

    올 들어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국내 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신용도 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현대자동차, SK이노베이션, LG화학, GS칼텍스, 이마트 등 한국 산업을 대표하는 굴지의 기업들이 대상이었다. 말 그대로 ‘무더기’ 강등이었다.

    국내 신용평가 3사도 올해 기업들의 전반적인 신용도 하향 추세는 피하기 어렵다고 일찌감치 예고했었다. 등급 전망을 조정하고, 하향검토 워치리스트에 등재하며 경고했다. 몇몇 기업들은 등급이 실제로 떨어지긴 했다. 하지만 국제 신용평가사 수준만큼 전반적인 등급 강등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이 때문에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상대적으로 소극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평가의 전제 조건이 다르다. 국내 대기업들이 한국 자본시장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은 절대적이다. 반면 이들 기업이 무디스나 S&P의 평가 체계 안에 들어가면 전 세계 수많은 기업들 중 하나, 말 그대로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된다. 평가되는 기업들의 모수 자체가 다르다.

    무디스 등급기준 상 마이크로소프트는 Aaa, 애플은 Aa1, 구글은 Aa2, 아마존은 A2 등급을 보유하고 있다. 국내 기업들은 삼성전자(Aa3)를 제외하면 사업적, 재무적 수치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큰 차이를 보인다. 애초에 비교 대상이 아니다. 투자자 풀(Pool)도 다르다. 무디스와 S&P의 등급을 활용하는 투자자들은 전 세계에 널려있지만 국내 시장은 국내 연기금과 은행, 보험사 정도다.

    스포츠를 예로 드는 것이 적절하다. 국내 리그 MVP가 세계 최고 리그로 간다고 해서 그 실력을 모두 발휘하고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국내 MVP라는 타이틀 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신용평가도 다르지 않다. 국내 기관투자가들에 국내 우량 대기업은 최선의 투자처이자 MVP지만 밖에 나가면 여러 후보 선수 중 하나다. 눈높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 크기의 차이는 신용평가사의 독립성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눈치를 적게 보느냐, 많이 보느냐 달라진다.

    한 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무디스나 S&P도 자국 기업평가 때는 어느 정도 영향을 받는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미국 금융당국의 규제가 한층 강화했다. 그런데 다른 국가, 또는 다른 국가의 기업 평가 때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과감하게 등급 조정을 취하는 것이 사실이고 국내 대기업들이 희생양이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건 국내 기업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니다.

    무디스, S&P에 비해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눈치를 볼 게 더 많고 그만큼 입지는 더 좁다. 애널리스트들은 평가방법론에 따라 어떤 기업이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등급을 조정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등급 조정으로 이어지는 데는 많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을 한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코로나 사태가 발생하기 전부터 기업들의 신용도 하향세는 이어졌고 상반기 중 대대적인 조정이 있을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코로라 사태로 제동이 걸린 모양새다. 상반기 중 등급 강등은 여의치 않아 보이고 하반기, 특히 4분기 때나 돼서야 움직일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들이 나온다. 실제로 4월중 강등이 예상됐던 기업들 중 대부분 기존 등급을 유지했다. 정부가 '전폭적인' 금융지원 정책을 내놓은 상황에서 신용평가사들이 대규모 등급 강등을 강행한다면 정부의 정책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금융당국, 각 기업들의 직간접적인 압박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신용평가사의 일선 애널리스트들이 업계를 떠나는 이유로 매너리즘, 허탈감을 꼽는다.

    회사채 같은 크레딧물의 평균 만기는 3년이다. 즉 신용등급은 장기적 전망이 담겨 있다. 신용평가가 애초에 증권사들의 매수(Buy), 중립(Hold), 매도(Sell)처럼 단기적 조정을 하기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시대는 빠르게 변하고 있다. 투자자들은 신용평가사들이 보다 빠르고 정확한 입장을 내놓기를 바라고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도 지난 10년 동안 특정 이벤트에 대한 스페셜코멘트를 내놓거나 e세미나를 통해 투자자 들과 접촉을 늘리는 등 변화에 발맞추려고 한다.

    올해도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평가 결과, 조정 시점 등을 두고 입방아에 오르내릴 것이다. 산업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기존 평가방법론에 대한 수정 요구도 끊임없이 받고 있다. 국내 신용평가사들이 다시 한번 저승사자 역할을 맡겠지만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시장 요구에 맞추려는 노력은 계속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는 게 바람직하다. 신용으로 구성된 자본시장에서 제대로 된 신용평가사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