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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신용평가사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한국의 코로나 대처 과정을 두고 ‘신경제(new economy)’ 기업들이 위기 상황을 상대적으로 잘 헤쳐나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재택근무에 필요한 IT제품 수요 증가 등으로 국내 신경제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양호한 실적을 기록한 사례가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준비하는 글로벌 기업들에도 의미있는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정유, 철강, 유통 등 ‘구경제(old economy)’ 기업들은 코로나 여파 속에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내 구경제 기업들이 회복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선 글로벌 경기회복이 선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자력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긴 어렵다는 얘기다.
코로나로 속도가 빨라진 산업 패러다임의 변화, 그 과정에서 한국 경제 주인공이 바뀌는 과도기를 맞으면서 자본시장에서도 주도권을 두고 전통 금융사의 올드머니(old money)와 신규 투자채널인 뉴머니(new money)가 맞붙는 모양새가 연출되고 있다.
올해 자본시장 리그테이블에서는 산업 및 그룹 구조조정, 증시 활황에 힘입은 자본성 자금 조달 증가가 두드러진다.
인수합병(M&A) 시장에선 아시아나항공 매각 무산, 두산그룹발 M&A 등 그룹 재무구조 개선 작업과 관련된 구경제 기업들의 딜(Deal)들이 주를 이뤘다. 채권자본시장(DCM)에선 넷마블을 제외하면 새로운 얼굴들은 거의 없다. 저금리 기조 때 선제적인 운영자금 조달, 또는 리파이낸싱 같은 구경제 기업들의 일상적인 자금 조달이 대부분이다.
주식자본시장(ECM)은 혼재된 모습이 엿보였다. 주식 시장 활황과 함께 IPO 대어들이 줄줄이 상장했고 다수 기업의 증자도 이어지는 등 자본성 조달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경기 침체 여파에 따른 전 산업의 부진이 자본 확충 수요를 늘렸다는 평가다. 거기에 몇년 전 IPO로 자본을 확충한 바이오, 헬스케어 기업들이 주식 활황을 이용해 2차 자금조달에 나섰다. 그 열기도 조금씩 식을 기미가 보인다.
외국계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주식시장을 빼면 M&A와 채권시장은 구경제 기업들이 중심이고 여기에 자금을 대는 기관도 올드머니이기 때문에 최근 몇 년간 활기를 느끼기 어려웠는데 코로나 이후 그런 분위기가 더 심해진 것 같다"며 "다들 바쁘게 움직이기는 하지만 대부분 그룹 지배구조 개선 과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것 외엔 눈에 띄는 딜(Deal)을 기대하기 어려운 분위기"라고 전했다.
국내 유가증권시장의 주인공도 바뀌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따르면 헬스케어, IT 기업들은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산업재 및 소재 기업들은 큰 폭으로 감소했다. 시가총액을 봐도 10년 전과 비교하면 헬스케어는 36.8배, IT는 3배 가까이 늘었다.
시장의 유동성도 ‘꿈’을 바라보고 있다. 기업의 꿈에 가치를 매겨야 한다며 주가꿈비율(PDR)이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투자자들의 관심은 장치산업에서 플랫폼으로 옮겨진 지 오래다. 그러면서 국내외 벤처캐피탈(VC)을 주축으로 존재감을 키운 이른바 '뉴머니(New Money)'가 자본시장의 메기가 됐다.
뉴머니는 성장이 기대되고 회수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업에 자금을 투입, 해당 기업이 성장하면 수익을 회수하는 그로스캐피탈 방식 투자를 한다. 대부분 VC로 출발해 사모펀드(Private Equity)로 성장하기도 한다.
기관투자자(LP)들로부터 대규모 투자금을 유치하며 운용자산 규모도 키우고 있다. 한국판 뉴딜정책으로 몸집을 키울 수 있는 여지는 더 커졌다. 특정 기술을 오래 들여다 본 곳들이 빛을 보기 시작했다. 바이오, AI 등 신사업 간판을 붙이려는 대기업들도 전통 금융사보다는 관련 산업에 정통한 VC들을 접촉하고 있다. 최근 SK그룹 배터리분리막 계열사인 SK IET 유상증자에 참여, 지분 10%를 확보한 프리미어파트너스가 대표적이다.
한 VC업체 관계자는 "중소 VC들이 대기업 신사업 투자에도 참여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는 VC들 뒤에 있는 LP들이 관심을 넓히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벤처투자 시장에 대한 대기업들의 관심도 커지면서 VC들과 접촉이 많아졌고 이제 주요 플레이어로서 무시할 수 없게 된 분위기”라고 전했다.
투자금 회수(엑시트) 성과도 나오기 시작했다. 규모가 작았을 때는 시리즈 A·B·C의 초기투자에 집중했지만 노하우를 체득하면서 시리즈 후반 투자자로 참여, 바이아웃까지 노리고 있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처럼 엑시트에 성공한 창업가들은 투자자로 전향하면서 새로운 투자 집단을 키우기도 한다.
올드머니도 이런 신기술 산업에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에선 골드만삭스가 신기술 스타트업 투자에 본격적으로 나서는 등 IB들이 새로운 금광 찾기에 혈안이다.
국내에서도 전통적인 자본시장과 접점이 크지 않은 유니콘 기업들의 등장에 자문사들은 접점을 늘리기 위해 고심하고 있다. 일례로 로펌업계는 뉴머니가 주요 주주로 구성돼 있는 쿠팡을 최고 'VIP'로 대우하며 추후 파생될 대형 딜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 대형로펌 파트너 변호사는 " 딜이 활발하게 나오지 않다보니 일상적인 법률 자문을 필요로 하는 쿠팡 같은 유니콘 기업들의 자문료가 더 쏠쏠해졌다”며 “사업 확장이나 투자 유치, 미국 나스닥 상장, 기업 매각 등 여러 가능성을 두고 김앤장을 포함한 모든 로펌들이 쿠팡만 바라보고 있다”고 전했다.
국내 초대형 IB 중 한 곳인 한국투자증권은 증권업계 최초로 PDR 가치평가를 시도했다. 성장성은 높지만 아직 이익이 나지 않는 비상장사들의 가치를 평가할 때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뉴머니 부상과 그에 따른 전통 금융사들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지만 동시에 견제의 시각도 분명하다. 미국의 니콜라 사태에서 보듯 뉴머니가 산정한 기업의 밸류에이션 기준이 수익성은 담보하지 않은 채 '꿈과 희망'만 판다는 비판이다. 건전성 지표를 꾸준히 관리해야 하는 전통 금융사들은 밸류에이션 산정에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과거의 성적표를 기반으로 등급을 매겨야 하는 신용평가사들은 말할 것도 없다.
뉴머니들이 존재감을 키우고 있더라도 특정한 수준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마중물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다는 의견도 있다. 어느 정도 성장한 후 엑시트를 목전에 둔 상황에선 규모가 큰 전통적 금융사 및 자문사들을 찾는 것이 더 안정적일 거란 시각이다.
그럼에도 돈이 모험자본으로 성장한 기업들로 향하는 물결은 부정할 수 없다. 발빠른 대기업들은 이젠 벤처조직을 그룹 내에 직접 만들어 뉴머니를 조달하기 시작했다. 직접 투자를 하기도 하면서 VC들과의 접점도 늘리고 있다. 전통적인 자본시장 플레이어들도 뉴머니와 함께 새로운 가치평가 모델을 찾는 패러다임 변화를 어떤 식으로든 받아들여야 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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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0년 10월 20일 07:00 게재]
구경제에서 신경제로 이동…자본시장 메기 된 '뉴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