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의 유통 혁신은 '회의'에서 안 나온다
입력 21.01.18 07:00|수정 21.01.20 08:22
  • 2020년은 롯데그룹에 악몽 같은 한 해였다. 삼성, 현대차, SK, LG가 포스트 코로나에 대응해 변신을 꾀하기 바빴던 데 반해 롯데는 재계 5위 덩칫값을 전혀 하지 못했다. 자본시장에선 존재감이 사라졌고 특히 그룹 핵심 축인 유통은 코로나와 이커머스의 공습을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대대적인 점포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고 연말엔 인력 및 조직 개편도 단행했다. 새해가 밝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롯데 유통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것은 아니다.

    일단 롯데그룹은 반성의 시간으로 한해 시작을 알렸다. 신동빈 회장은 계열사 대표이사 등 130여명의 임원이 참석한 올해 첫 가치창조회의(VCM)에서 “과거의 성공 경험을 과감히 버리라”고 주문했다. “성장이 아니라 생존 자체가 목적인 회사에는 미래가 없다”면서 “업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했음에도 부진한 사업군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략이 아니라 실행의 문제”라고 자문자답했다.

    틀린 말이 하나도 없다. 신 회장은 롯데 유통 혁신의 문제점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 실행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는 게 문제다.

    “대기업 특유의 수직적인 조직 문화, 거기에 더해 롯데의 폐쇄적인 조직 문화는 전략을 실행으로 옮기는 데 한계가 있다”고, 롯데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해본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얘기한다. 외부 출신들이 많지 않고 대부분 ‘롯데맨’ 임원들이 많다보니 ‘회장님’ 눈치를 보거나 틀린(?) 말은 하지 않고 입맛에 맞는 얘기만 한다는 것이다.

    이 폐쇄성이 과거엔 서로를 끈끈하게 엮어주는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지 못하는 직접적 원인이 됐다. 혁신을 얘기하는 자리에서도 외부의 다양한 사람을 받아들이고, 의견들을 듣고, 이를 조합하기 보단 ‘A to Z’, 즉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그룹, 회사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이 느껴진다.

    비단 롯데만의 문제가 아니다.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일단 태스크포스팀(TFT)부터 만들어 보고 결론 없이 끝날 줄 모르는 회의를 계속하는 대기업들이 부지기수다.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실행으로 옮겼다가 실패하면 책임은 손을 든 사람에게, 성공하면 ‘회장님’에게 그 공을 넘기는 기업 문화의 한계다.

    최근 더그 맥밀란 월마트 CEO의 세계가전박람회(CES) 기조연설은 국내 유통 대기업들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인공지능(AI), 5G, 고성능반도체, 배터리 등등 혁신을 꾀할 기술들은 이미 주변에 깔려 있다. 맥밀란 CEO는 “이를잘 조합하기만 해도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는데 문제는 이를 빠르게 종합하고 시행하는 능력이 발달돼 있지 않다”고 얘기한다.

    하루 빨리 이 기술들을 조합(또는 기술 기업을 인수)해 이 모든 혁신의 이유인 ‘고객 니즈’를 충족시켜야 하는데 대부분은 기술을 본인들이 직접 개발하려고 시간과 비용을 낭비한다. 그동안 ‘공룡’으로 불려왔던 국내 유통 대기업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외연 확장보단, 내부 구조조정 같은 쉬운 길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이다. 누구를 위한 혁신일까.

    롯데를 포함한 국내 유통 대기업들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고정관념을 깰 필요가 있다. 한 때 비싸게만 보였던 ‘11번가’는 확장성 측면에선 이제 비싸 보이지 않게 됐고 이베이코리아, 요기요 매각에서 언급되는 5조원, 2조원이라는 플랫폼 기업가치의 숫자에도 익숙해지고 받아들여야 한다. 70년이 넘은 월마트는 아마존 출현 이후로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끊임없이 혁신 중이다.

    "혁신적으로 변하지 못하는 회사들은 과감한 포트폴리오 조정을 검토해봐야 한다"

    "미래 관점에서 비전을 수립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장 환경에 부합하는지 수시로 재점검해야 한다"

    신동빈 회장은 비전 달성을 위한 지속적인 투자와 실행력 제고를 주문했다. 회장님 말씀을 들은 임원들은 또 회의부터 할 생각을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