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된 국정농단 혐의에 대해 2년 6개월의 실형을 확정했다. 표면상으론 삼성그룹의 사법 리스크가 다소 걷힌 것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사실 이 부회장에게 적용된 ‘불법 경영권 승계’ 혐의는 아직 1심 재판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라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최악의 경우엔 삼성그룹은 향후 수년간 그룹 총수가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자체 조직과 시스템만으로 험난한 경영 상황을 타개해야 한다. 다행히도 반도체 업황의 전망은 당분간 좋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글로벌 선두업체들이 이합집산하며 삼성을 견제하고 있다는 점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미래전략실 해체 이후 그룹의 구심점은 사라졌다. 미봉책으로 제시됐던 사업지원TF는 그 정체성과 역할이 모호하다. 그룹 경영의 감시자 역할을 자처했던 준법감시위원회 또한 법원으로부터 실효성을 인정받지 못하며 총수가 사라진 삼성의 앞날은 더욱 불투명한 상황에 빠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부회장은 과거 354일 동안 수감됐는데 이번 파기환송심의 판결에 따라 기존 수감 기간을 제외한 약 560일의 수감생활을 더 하게 됐다. 이 부회장 측이 상고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다만 구속 기간이 약 1년6개월여 밖에(?) 남지 않은 점과 상고심 재판이 길게는 1~2년 소요된다는 점에서 상고심의 실효성이 그리 크지는 않다는 평가도 있다.
2015년 이후 삼성그룹에 남아있던 총수 부재 시나리오와 투자자들이 체화한 사법리스크 덕분에 이 부회장의 구속수감이 당장 삼성그룹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지난 18일 주식시장에서 삼성그룹 관련주가는 잠시 주춤했으나 개인투자자와 기관투자자들의 매수세가 몰리며 이내 안정을 되찾았다.
국내 한 기관투자가는 “이 부회장의 구속 여부는 이미 투자가들 사이에선 주가에 영향을 미칠만한 이슈가 아니었다”며 “향후 1~2년 내 그룹의 주력인 삼성전자의 사업 전망이 상당히 좋고, 수급적인 측면에서도 안정적이기 때문에 삼성측의 바람과는 달리 총수 관련 이슈가 앞으로도 투자자들에게 크게 부각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고 했다.
다소 왜곡된 주식시장 그리고 반도체 시장의 장밋빛 전망은 삼성그룹의 긴장감을 해소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총수 부재의 상황은 삼성그룹을 지탱하는 삼성전자에 상당히 뼈아픈 상황이 될 수도 있다.
현대차와 SK, LG 등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연초부터 자본시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보스턴다이내믹스(현대차), 플러그파워(SK그룹), 마그나인터내셔널(LG) 등 삼성그룹을 제외한 대기업들은 순식간에 조단위 딜을 휩쓸었다. 글로벌 기업들간의 사업 경쟁의 전선이 과거 주력 사업에만 머물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M&A 거래들이다.
반면 이 부회장의 재판에만 총력을 기울였던 삼성그룹은 하만 인수(2016년) 이후 이렇다 할 사업 확장 전략을 제시하지 못했다. 총수 부재에 관한 우려, 이 부회장의 현장 경영 등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삼성의 대규모 투자는 이 부회장의 형(刑)이 확정된 이후로 미뤄졌다. 그 사이 삼성전자의 구심점이자 투자의 핵심 조직으로 꼽히던 사업지원TF의 위상도 주춤해졌다.
삼성그룹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다른 대기업이 발빠르게 M&A에 나서고 있고 수년 동안 사업지원TF는 여러해 성과가 없어 조급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고 했다.
현재까진 공고했던 반도체 사업이 삼성전자를 지탱해 왔지만 시장의 경쟁 강도는 훨씬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 변수다.
반도체 위탁생산 세계 1위업체인 대만의 TSMC는 지난주 역대 최대 규모의 투자계획을 밝혔다. 전세계적으로 반도체가 공급 부족 상황에서 TSMC가 발표한 올해 설비 투자액은 약 30조원(280억달러), 삼성전자의 투자예상치 약 12조원을 크게 뛰어넘었다. 자율주행을 비롯한 미래차 분야를 비롯해 글로벌 기업들이 차세대 먹거리로 삼고 있는 사업군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예고한 것이다.
물론 삼성전자 또한 이 부회장이 옥중경영을 통해 최종 의사결정권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겠지만 ‘도장만 찍으면 되는’ 식으로 경영을 이어가기엔 한계가 분명하다. 그룹의 총수 또는 국가의 원수가 직접 카운터파티(Counterparty)로 나서 협력에 대한 밑그림부터 사인까지 마무리 짓는 그룹들의 최근 M&A의 특성상 총수 부재는 삼성그룹의 대외 입지가 줄어들 수밖에 없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보인다.
단적인 예로 삼성그룹은 SK그룹의 수펙스추구협의회와 같은 의사결정 기구가 없다. 미래전략실은 이미 해체했고 사장단 회의도 폐지했다. 사업지원TF의 위상도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이제와서 이 부회장의 복심을 모아 새로운 조직을 만들기엔 그간 이 부회장의 공언(空言)이 발목을 잡는다.
사실 이 부회장의 재판과 더불어 삼성의 핵심 인사들 일부는 함께 구속됐다. 이 부회장은 미전실 해체당시 삼성그룹을 떠났던 정현호 사장을 비롯한 일부 인사들을 다시 불러들였는데, 이는 과거 삼성그룹을 이끌었던 몇몇의 인사를 제외하고는 이 부회장의 최측근 핵심 인재가 사실상 많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최고의사결정기구의 부재는 삼성그룹의 끊임 없는 리스크로 작용해 온 게 사실이다. 삼성그룹에 사법리스크가 5년 넘게 드리우고 있는 동안, 비선(秘線)으로 일컬어지는 조직이 아닌 공식적인 의사결정기구를 만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는 충분했다. 더군다나 이재용 부회장은 "자식들에게 경영권을 승계하지 않겠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기 때문에 ‘포스트 이재용’ 시대를 위한 의사결정기구를 일찌감치 준비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기남 부회장(DS부문장), 김현석 사장(CE부문장), 고동진(IM부문장) 등 삼성전자의 핵심들도 이 부회장의 의사결정을 보좌하는 역할에 그쳤을 뿐 이 부회장이 구속된 현재, 그룹의 구심점을 대체할 인사로 꼽히진 못한다. 결국 이재용 부회장의 구속된다면 ‘플랜B’로의 전환이 불가피 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나 이에 대한 대비에 대해 핵심 경영진 그 누구도 섣불리 꺼내지 못했다는 지적에선 자유로울 수 없다는 평가다.
1년 6개월, 딱 560여일만 불안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앞으론 더 큰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과 관련한 불법승계 의혹 재판이다.
검찰은 이 부회장과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차장, 최치훈 삼성물산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총 11명을 기소한 상태다. 적용된 혐의는 자본시장법상 부정 거래 행위, 시세조정과 업무상 배임이다. 이 부회장에 대해선 과거 제일모직 자회사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 회계 의혹’과 관련해 ‘주식회사 외부감사법’을 위반한 혐의도 적용했다.
아직 1심 공판도 열리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항소심과 상고심 등을 고려한 재판은 향후 수년간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 이번 파기환송심의 판결이 해당 재판에 미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최악의 경우엔 삼성그룹에서 총수가 부재한 상황이 ‘상수’가 될 가능성도 고려해아한다.
-
[인베스트조선 유료서비스 2021년 01월 19일 16:42 게재]
1심~상고심 고려하면 수년간 사법리스크 발목
투자자 수급·장미빛 전망에 가려진 삼성전자 미래
JY 감형에 사활걸어 대형 투자도 축소
대체 인사도 조직도 없어 의사결정 어려워
투자자 수급·장미빛 전망에 가려진 삼성전자 미래
JY 감형에 사활걸어 대형 투자도 축소
대체 인사도 조직도 없어 의사결정 어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