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분쟁 종식…남은 건 SK이노베이션 공과(功過) 정산
입력 21.04.19 07:00|수정 21.04.20 10:06
배터리 합의 득실 평가 엇갈려…SK는 배터리 밸류체인 수성
SK이노 배터리, 2017년 이후 급성장 했지만 수년간 잡음도
강공 일변 협상 성과 미미…그룹 수뇌부 나서서 물꼬
  • SK이노베이션과 LG에너지솔루션(LGES)의 배터리 분쟁이 극적인 합의로 막을 내렸다. 합의금 협상이 오랜 기간 교착 상태였으나 SK그룹이 전사적으로 총력전을 편 끝에 배터리 사업을 수성하게 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남은 것은 SK이노베이션 경영진에 대한 공과 평가다. 배터리 사업을 단기간에 그룹의 핵심 먹거리로 끌어올린 공(功)이 있는 반면, 그 과정에서 과(過)도 부인하기 어렵다. 강공 일변의 협상 전략을 펴는 사이 사업 확장이 늦어졌고, 사업을 송두리째 위기로 몰아넣을 뻔했다는 점도 아쉬운 평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2일 SK이노베이션과 LGES는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사건을 현금 1조원, 로열티 1조원 등 총 2원에 마무리했다고 각각 밝혔다. 어느 쪽이 득이 많은지 설왕설래가 오갔다. 징벌적 손해배상 시 합의금이 8조~9조원에 이를 것이란 예상보다는 한참 미치지 못했으니 SK이노베이션의 판정승이란 평과, 결국은 SK이노베이션이 값을 치렀으니 LG가 득을 본 것이란 평가가 엇갈렸다.

    합의 공시에서도 두 회사의 미묘한 기싸움이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은 ‘총 1조원 한도 소정의 로열티를 지급’, LGES는 ‘23년말 현재가치 기준으로 총 1조원에 해당하는 로열티 추가 지급’이라고 했다. SK이노베이션 배터리 매출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지불하는데 1조원을 채울 때까지 지급한다. 지급금액의 '실링'(Ceiling)은 있지만 2023년말 기준이라는 점이 변수다.

    자본시장 관계자는 “미래 로열티를 2023년 기준으로 할인한 것이 1조원이기 때문에 실제로 지급하게 될 로열티는 1조원 이상이 될 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SK그룹 전체로는 최악의 상황을 피했는데, 지금까지 SK이노베이션의 전략 수행과 대응에 대해선 공과 평가가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SK이노베이션은 일찌감치 배터리를 미래 먹거리로 점찍었지만 성취는 더뎠다. 회사는 1982년 이후 독자적으로 배터리 기술을 개발해왔다 강조하는데 그룹의 육성 의지는 시기마다 커졌다 줄었다를 반복했다.

    본격적으로 사업에 속도가 붙은 것은 2017년 김준 사장 취임 이후다. 해외 각지에 설비를 늘려가면서 고객군도 넓혀 갔다. 2016년 1441억원(매출 비중 0.004%)이던 배터리 사업 매출은, 작년 1조6102억원(4.7%)으로 10배 이상 성장했다. 머지 않아 이익 구간에 접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성장 과정에 잡음이 따랐다. LGES와 갈등의 계기가 된 연구 인력 유출 사건도 일어났다. LG화학은 직원을 유출해 기술을 빼갔다고 했지만,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의 기업문화가 문제라고 꼬집었다. 여러 해 소송전과 여론 공방전을 펼치며 두 기업의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2019년 9월 신학철 LG화학 부회장과 김준 사장이 정부 중재로 만났을 때도 큰 시각차만 확인했다. 배터리 산업이 성장궤도 초입에 있던 터라 LG화학 측 요구가 크지는 않았지만 SK이노베이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최초 수천억원 수준으로 거론되던 합의금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났다.

    SK이노베이션 경영진이 상황을 오판해 그룹 수뇌부에 객관적인 정보를 전달하지 못한 것 아니냔 지적이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의 전신은 유공으로, SK그룹이 지금까지 성장하는데 초석을 다진 공이 있다. 그러다 보니 유공 출신 인사들은 자부심이 크고, 자기 목소리가 강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판결 후에도 SK이노베이션은 강공을 폈다. 문서 삭제 문제로 인해 영업비밀 침해 여부는 다퉈보지도 못했다고 했지만 애초 전략 설정이 잘못됐다는 지적이 있었다. 국제적인 분쟁에서 경험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삼성처럼 경험 많은 기업이었다면 ITC 조사 절차에 들어가면 서류나 이메일을 건드리지 말라고 바로 지시를 했을 것”이라며 “ITC 소송에선 영업비밀 침해보다 무서운 것이 증거인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SK이노베이션의 대응이 아쉬웠다”고 말했다.

    미국 행정부와 ITC가 생각이 다른 경우가 많다지만 이번 배터리 분쟁에선 다른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지 않았다. 중국 등 지적재산권(IP) 침해 문제에 연일 공세를 펴는 마당에 SK이노베이션의 편을 들기 어려웠다. 배터리 공급 유예기간을 준 것도 번복의 여지를 남겼다기보다, 자국 자동차 산업 보호에 초점이 맞춰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는 것은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컸다.

    그 사이 SK이노베이션의 사업 확장은 차질을 빚었다. 완성차 업체들은 배터리 내재화를 외치기 시작했고, 중국 배터리 기업들의 약진이 있었다. SK이노베이션은 유럽 추가 투자도 진행 중인데, 금융사들은 합의금 불확실성에 지원을 꺼렸다. 합의가 이뤄진 후에야 자금 지원 논의가 재개된 모습이다.

    SK이노베이션 경영진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미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끝까지 강공을 폈다면 배터리 사업을 넘어 기업 전체가 위험에 빠지고, 배터리 사업 밸류체인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통상전문가 김종훈 SK이노베이션 이사회 의장의 역할도 모호했다는 시선이 있다.

    결국 그룹 수뇌부가 ITC 판결 후 적극적으로 움직였고, 두 그룹 차원의 합의를 이끌낸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가 배터리 문제에 여러 차례 우려의 목소리를 표한 것도 SK그룹의 입장을 반영한 것 아니냐는 평가가 나왔다.

    SK이노베이션 경영진은 무색해질 상황이다.

    배터리 육성의 중책을 맡아 성과를 일궜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부정이 개입됐다는 사실이 확정됐고, 대규모 합의금과 천문학적인 소송 비용 부담을 안게 됐다. 회사 입장에선 필요없다고 강조해 온 기술 때문에 '생돈' 2조원을 날린 셈이다. 조기에 문제 수습에 나섰다면 시간과 비용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작년부터 그룹 수뇌부에서 SK이노베이션 경영진에 대한 평판을 예의주시하고 있기도 했다.

    사업을 할 수 있는 선에서 합의한 것은 다행이지만, 책임이 작지 않다는 분위기다. SK이노베이션의 석유, 화학, 윤활유 사업 등은 점차 그룹의 변방으로 밀려가고 있다.

    SK그룹 사정에 밝은 한 관계자는 “이번 합의에서 SK이노베이션 경영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고, 결국 그룹이 직접 움직여 합의를 이끌어 냈다”며 “SK이노베이션 경영진의 입지는 더 좁아지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