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공모주 시장...진퇴양난 운용사들
입력 21.05.06 07:00|수정 21.05.07 13:37
밴드 초과 공모가 속출...주관사 분석 의미 없어
운용역들 '묻지마 투자'...손실보다 못 버는 불안감이 더 커
  • “그거 아세요? 원래 주식 투자할 때 잃는 서러움보다 ‘대박’을 못 낸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입니다. 요즘 같은 공모주시장에서 기관들도 다를 것이 없어요. 투기판에서 나만 못 따는 건 잃는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한 중소형 운용사 운용역)

    공모주시장에서 ‘미친 유동성’ 장세가 이어지면서 기관마저  ‘묻지마 투자’에 동참하는 현상이 속속 벌어지고 있다. 어느 정도는 통용되는 투자 법칙들이 개념부터 무너지는 사례들이 속출하고 있는 탓이다. 대어급 상장사들은 기업가치, 공모가 등에 상관없이 단 몇 주라도 받으려는 기관들이 줄을 서고 있다.

    실제로 공모주 투자를 위해 새로 자문사를 차리려는 시도도 많아졌다는 후문이다. ‘물 들어올 때 노 젓자’는 분위기로 조그마한 자문사를 통해 투자 수익을 내려는 시도다. 인가를 받기 위해 금융당국에 줄을 섰다는 씁쓸한 얘기도 들려온다.

    이 같은 시장 분위기는 정상적이지 않다. 최소한 현재까지 공모주시장에서 통용되던 법칙과 상당한 온도 차이가 있다는 점은 명백하다. 이 때문에 운용사들을 비롯한 기관투자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공모주 투자에 나선다는 얘기까지 들려온다. 사실상 기관투자자의 공모주 투자 시장조차 일반 투자자의 주식투자 열풍에서 크게 차이나지 않는 셈이다.

    한 투자자문사 대표는 “작년까지는 투자할 회사의 향후 전망, 성장성, 밸류에이션(기업가치) 등등 따져봤지만 요새는 그렇지 않다. 종목명과 수급 정도 따져보고 일단은 다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자본시장은 흡사 톱니바퀴와 같다. 시장 플레이어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때 비로소 잘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물 흐르듯 흐를 수 있다. 공모주시장 역시 마찬가지다. 주관사의 공모가 산정, 운용사의 투자성 분석, 투자자의 합리적 판단까지 잘 맞물리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시장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시장에서는 주관사의 산정 능력이 마치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수요예측 이후 공모가가 밴드를 큰 폭으로 웃도는 사례가 많아지면서, 기관의 역할도 무색해졌다는 평이 나온다.

    통상 공모가는 주관사들이 발행사의 적정한 기업가치를 산정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장의 반응을 종합해 정해진다. 만약 공모가가 밴드를 초과하거나 밑돈다면 이는 주관사들이 공모가 범위 설정을 잘못했다는 의미다.

    공모가가 비싸다고 해서 투자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대부분의 운용사들이 대어급 공모주를 필수적으로 담다시피 하는 상황인 데다, 비정상적으로 ‘따상(시초가가 공모가의 두 배)’을 가는 종목들이 나오고 있어 손 놓고 있기에는 불안감이 크다는 것이다.

    증권사의 한 법인운용본부장은 “대어급 공모주는 일단 몇 주라도 가지고 있어야 떨어질 때 떨어지더라도 대응이 가능한데, 아예 받지 조차 못하면 ‘따상(시초가가 공모가 두 배)’ 나온 후에 손발이 묶여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공모주 투자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고 운용역들이 입을 모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남들 다 하는 '핫'한 공모주 종목에 투자하지 않기가 어렵지만, 그렇다고 스스로의 투자 판단에 의거해 차별화된 전략을 세우기도 쉽지 않은 시장이라는 이유에서다.

    지금같은 장세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장담하기는 어렵다. 똑똑한 개인투자자들은 증가하고 있다. 당장 공모주 시장에서 개인과 기관의 격차가 눈에 띄지 않고 있다.

    한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공모주 시장에서 이렇게 자금이 늘어나게 된 것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하나의 흐름 변화로 봐야할 지도 모른다”라며 “과장해서 말하면 운용역들이 적응이냐, 도태냐의 기로에 놓여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