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 채용난'에 디지털 전환 막힌 은행
입력 21.06.23 07:00|수정 21.06.22 18:03
개발자한테 낯선 근무환경
메리트 없인 인재 확보 어려울 듯
  • “최근 헤드헌터로부터 6개월 프로젝트에 4000만원 급여의 오퍼가 와서 좋았지만, 은행이더라고요. 언젠가 버려질 게 뻔하고 책임도 떠넘길 것 같아서 거절했죠.” (30대 팀장급 개발자)

    사업의 성장 한계를 뛰어넘어야 하는 은행사들은 디지털 전환(DT)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됐지만, 공통으로 인력수급 난을 겪고 있다. 핀테크 기업과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은행원들의 역할은 줄고 그 공백을 개발자들로 채워나가야 하지만, 기존의 경직된 조직 구조로 인해 인력들이 손사레를 치고 있는 것이다.

    지난 8일 KB국민은행은 채용 인원 200명 가운데 최대 170여 명을 개발자로 뽑기로 했다. 다른 은행도 디지털 인재 확보에 나섰지만, 분위기는 어둡다. 최근 IBK기업은행이 개발자들 사이에서 외면받으면서 우려가 커졌기 때문이다. 한 은행권 관계자는 “명색이 국책은행인 기업은행 인력 모집에 '0명'이 지원했다는 건 업계에 충격적이었다”라고 말했다.

    시중은행은 더 절박하게 디지털 인재 확보에 나서고 있다. 한 시중은행은 디지털·IT 부문으로 입사하는 직원 전부 MBA 과정을 이수토록 했다. 신입의 경우 영업점에서 근무하다 본점으로 선발되는 게 관행인데, 영업점에 파견만 보내고 본사로 복귀해 디지털 전략을 수립하는 방식으로 패러다임이 변화된다.

    일반 행원도 코딩 역량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업계의 트렌드다. 중간관리자 급부터 디지털 역량이 필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원활한 의사소통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공공연히 내놓고 있다. '디지털 언어'가 최근 은행의 핵심 키워드다.

    하지만 은행의 기업문화, 일률적인 급여 체계 등이 발목을 붙잡는다는 지적이다. 개발자 업계는 철저한 능력주의 세계다. 지시받는 업무보다는 주도적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몸값을 끌어올려야 한다. 코드 하나 변경하는데도 결재를 받아야 하고 매일 업무 보고를 올려야 하는 은행은 개발자들한테 낯선 직장이다.

    답답한 건 은행도 마찬가지다. 개발자가 프로그램을 한번 잘못 건드리면 고객의 돈이나 개인정보가 사라질 수 있어 관용을 베풀기가 어려운 조직이다. 카카오·네이버 금융의 거침없는 성장에 은행도 혁신이 필요하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지만, 이 대목에서 주춤할 수밖에 없다.

    은행처럼 시스템이 갖춰진 경직된 조직보다는 차라리 초기 스타트업에서 포트폴리오를 쌓는 것이 커리어 입장에서도 좋다. 개발 업계는 직접 개발을 해서 성과를 이룬 포트폴리오를 높게 사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조직은 역설적으로 개발자의 성장성을 가로막는다.

    개발자의 연봉은 능력에 따라 좌우해 정해진 ‘연봉 테이블’이 없지만, 은행권에서는 연봉체계가 잡혀있어 파격적인 대우로 개발자를 채용하기 어렵다. 최근 네이버·카카오가 고액연봉을 제시하며 ‘개발자 모시기’에 나선 것과 대조적이다.

    인력 수급난에 내부 인재를 키우거나 개발 인력을 외주에 맡기는 방안도 거론되지만, 미봉책이다. 은행사별로 IT 수장들을 배치했는데, 이들의 의중을 파악하고 손발이 되어줄 수 있는 인력을 원해서다. 은행은 당장 카드사와 연계해서 데이터양을 쌓아가야 하며, 콜센터도 AI화해야 하는 과제에 놓여있다. 업계 관계자들은 단순 개발자 인력 확보의 문제가 아니라고 입을 모았다.

    은행 관계자는 “디지털 인재들은 구글이나 카카오 같은 IT 회사를 선호하지 은행을 준비하지는 않는다”며 "개발자 기피하는 현상에 대응하려면 은행이 개발자 개인의 능력을 개발해준다는 메리트를 제공해야 한다는 인식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