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이사회 자율경영, 사실상 멈춰있었다
입력 21.08.30 07:00
취재노트
이사회 중심 자율경영 5년
김기남·김현석·고동진 대표 3인체제 확립
이 부회장 부재에 멈춰선 투자 활동
대규모 M&A, 이사회 대형 투자 결정도 사라져
오너 가석방 이후 일사천리 움직이는 ‘이사회’
“총수 의존도 높아질수록 이사회 실기(失期) 더 늘 듯”
  • “저도 전문경영인 출신이지만 굉장한 적자, 불황 상황에서 ‘몇 조 투자하자’고 말하기 쉽지 않다”
    <2020년 7월 사내 간담회, 권오현 전 삼성전자 회장>

     “큰 숲을 보고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 역할은 이재용 부회장이 하는 것”, “전문경영인이 서로 돕는 체계로만은 잘 되지 않는다. 전문경영인은 큰 변화를 만들 수 없고 빅 트렌드를 못 본다”
    <2020년 7월, 김현석 가전(CE) 부문 사장>

    삼성의 최고 경영진이 밝힌 전문경영인 체제의 한계는 현실이 됐다. 240조원에 달하는 그룹의 최대 규모 투자 계획이 이재용 부회장이 가석방된 지 불과 11일 만에 발표됐고, 이사회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 스케줄에 맞춰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투자 발표는 이사회 보고를 거치는 등 형식적인 절차를 갖췄지만 사실상 이 부회장의 복귀에 따른 과감한 결단이었단 점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삼성전자가 수년간 사법 리스크에 시달리며 내세운 전략은 이사회 중심의 자율 경영이다. 오너에 집중된 의사결정 권한을 각 이사회에 위임하고 전문경영인을 통한 책임 경영과 사외이사의 촘촘한 감시망을 갖춘 시스템을 구축하겠단 의도이다.

    삼성전자는 2018년 김기남 부회장(DS 부문), 김현석 사장(CE 부문), 고동진 사장(IM 부문) 등을 포함한 사내이사진을 마련했다. 동시에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고, 지난해부턴 사외이사인 박재완 전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이사회 의장을 맡겼다. 2019년 10월 이재용 부회장의 사내이사 임기가 만료된 이후부턴 전문경영인 5인의 체제가 자리를 잡아야 했다. 실제로 이 부회장이 구속수감된 이후부터 삼성전자의 경영 활동은 오롯이 이사진의 몫이 됐다.

    시스템 상으로만 본다면 대규모 투자를 비롯한 의사 결정은 이사회 및 이사회 산하 경영 위원회에서 내리게 된다. 경영 위원회는 김기남 위원장을 비롯한 5명의 사내이사로 구성돼 있다. 경영 위원회의 주된 역할은 ▲회사의 연간 또는 중장기 경영방침 및 전략 ▲주요 경영전략 ▲사업계획·사업구조 조정 추진 등을 심의하고 결의하는 역할을 한다. 과거의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던 미래전략실이 사라진 이상, 이사회가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계획을 비롯한 중장기 전략 등을 관할하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셈이다.

  • 그러나 삼성전자의 반복되는 투자 발표의 패턴을 비쳐볼 때 이 부회장 부재(不在) 상황에서 이사회가 과연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은 남는다.

    이 부회장이 구속수감된 2017년 이후부터 삼성전자의 대규모 M&A는 사실상 멈췄고, 대신 대규모 주주환원책이 등장했다. 

    그러다 2018년 2월 이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석방되자 삼성전자는 3년간 180조원 규모의 투자를 결정했다. 그리고 이번에 이 부회장의 가석방 직후 역대 최대 규모 투자를 발표했다.

    이 부회장에 대한 사면론이 확산하던 올해 5월, 삼성전자는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으나 과거 ‘시스템반도체2030비전(133조원)’을 확대한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삼성전자는 이번 발표에서 ‘반도체 분야의 공격적 투자 필요성’에 대해 ‘국내외 비상 상황을 감안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의 반도체 산업 지원 ▲유럽연합의 반도체 점유율 20% 목표 ▲중국의 R&D 예산 확대 등을 원인으로 꼽았다.

    사실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이 같은 위협 요인은 근래 발생한 게 아니다. 주요국의 반도체 투자 확대 기조는 지난해부터 가시화했고, 시스템반도체 부문에서 인텔과 TSMC의 공격적인 투자는 벌써 수년째 이어져 오고 있다. 삼성전자가 그룹의 명운을 걸고 있는 파운드리 분야에선 TSMC와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지만, 이 부회장이 정상적으로 경영활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동안 이사진만의 결정으로 과감한 투자에 나서지 못하면서 사실상 실기(失期)에 가깝다는 평가마저 나온다.

    투자은행(IB) 업계 한 관계자는 “(파운드리 분야) 후발주자로서 TSMC를 압도할 수 있는 투자 규모를 내세운 것도 아니고, 오너 리스크에 투자 결정 또한 신속히 내리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글로벌 1위를 탈환한다는 건 쉽지만은 않다”며 “(이번 투자 발표는) 이사회가 이재용 부회장의 복귀와 결정만을 기다리면서 적기에 투자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시스템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라고 지적했다.

    이 부회장이 부재한 상황은 언제든 재현될 가능성이 있다. 경영권 불법 승계 재판은 1심 판결도 나지 않은 상태다. 이 부회장에 대한 그룹 차원의 절대적인 의존도가 드러났고, 이사회 중심의 자율 경영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은 투자자들이 삼성전자의 미래 방향성을 더욱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특히 전체 주주의 50%에 가까운 외국인 투자자들의 시각에선 지분의 2%도 채 보유하지 않은 미등기임원에 의해 그룹 전반에 걸친 투자가 좌지우지된다는 점, 투자의 계획과 집중도가 온전히 삼성전자의 성장과 투자 회수가 맞춰진 것이 아닌 정치 논리에 분산된다는 점이 여전히 리스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