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APG, 삼성·SK에 주주서한…해외 연기금 '기후대응' 압박 본격화
입력 22.02.17 08:01
삼성·SK·LG ·롯데 등 5대 대기업 포함
"글로벌 위상에 비해 탄소 감축 노력 부족"
'이제 시작'…해외 연기금 공동행동 가능성
삼성 내부서도 갈팡질팡…결단은 대선 이후?
  • 세계 3대 연기금 중 하나인 네덜란드 공무원연금(ABP)의 기금운용자회사인 APG(All Pension Group)가 삼성전자와 SK 등 국내 주요 대기업에 ‘기후위기 대응’ 촉구에 나섰다. APG가 글로벌 연금 펀드 중 가장 ESG(환경·사회·거버넌스) 투자에 앞선 곳인 만큼 이후 다른 해외 연기금들도 국내 대기업에 압박을 시작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해외 투자자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면서 국내 기업들의 탄소 감축에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17일 APG는 국내 10개 기업(Focus 10)을 대상으로 ‘기후위기 대응 및 탄소배출 감축 전략의 혁신적인 실행에 대한 제언’ 주주서한을 발송했다고 밝혔다. 10개의 주요 탄소 배출 대기업으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해 SK㈜, 현대제철, LG화학, 포스코케미칼, 롯데케미칼, SK텔레콤, LG유플러스, LG디스플레이가 선정됐다.

    APG의 아시아 태평양지역 책임투자를 담당하는 박유경 총괄이사는 이번 주주제안의 목적에 대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COVID-19) 사태로 기관투자자들은 지속가능성이 담보되지 않은 성장은 진정한 성장이 아니라고 보다 깊게 성찰하는 기회를 가졌다”며 “해당 기업들의 지난 몇 년 간 발표했던 기후위기 대응 및 탄소배출 감축 전략의 적정성과 실행 성과에 대해 질문하고, 글로벌 기업으로서 위상에 맞는 실천을 촉구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APG는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북미, 유럽 등 전세계 시장에서 약 850조원(2022년 1월 기준)의 연금자산을 운용하는 거대 연기금운용사다. 해외 연기금 중에서도 특히 지속가능성 투자, 사회적 책임 투자, 기업 지배구조를 고려하는 투자에 가장 앞장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엔 광주 아파트 붕괴사고를 낸 HDC현대산업개발에 대해 안전관리 강화 내용의 정관 변경 주주제안을 하며 주목받았다. 

    APG는 서한을 통해 각 사의 경영진 및 이사회는 ▲회사가 기존에 발표한 기후위기 대응 및 탄소배출 감축전략이 충분히 미래지향적이라고 보는지 ▲회사가 지난 5년간 탄소배출 감축을 충분히 달성했다고 보는지 ▲해당 이슈를 장기투자자들과 충분히 소통하고 논의하는지 ▲기후위기 대응에 대해 일관성있고 결단력있는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더불어 현재 각 사가 준비 중인 탄소배출 감축에 대한 실행방안을 이번 정기주주총회를 전후해 발표하는 것을 건의했다. 

  • “韓대기업, 글로벌 위상에 비해 기후 대응 후진적”

    APG는 각 기업 선정 이유와 탄소배출량 등 관련 수치까지 공개했는데, 해외 연기금 투자자가 이렇게 주주제안 내용을 자세히 공개하는 것도 드문 일이다. 그만큼 본격적인 압박을 가하겠단 메시지로 읽을 수 있다.

    APG는 특히 국내 대표 기업이자 글로벌 기업인 삼성의 ‘늑장 대응’을 꼬집었다. 5대 기업(삼성·현대자동차·SK·LG·롯데) 중 탄소중립을 공식적으로 선언하지 않은 기업도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삼성전자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전기를 사용하는 기업이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에서 삼성의 탄소중립과 RE100 선언(사용전력을 100% 재생에너지로 조달하겠다는 캠페인) 관련 준비 여부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삼성전자의 매출액 대비 탄소 배출량은 8.7%로, 동종업계인 애플(Apple)의 0.3% 보다 현저히 높다. 애플은 미국 정부의 압력이 아닌 회사 자체적인 탄소 절감 정책을 수립했고, 2030년 목표로 탄소중립 선언을 했다. 이미 일부 범위에선 탄소중립을 실현한 상태다.

    삼성전자가 대부분 국가들의 탄소중립선언 시기인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맞추기 위해선 매년 58만6000톤의 탄소를 감축해야 하지만 현재 매출 증가에 맞춰 오히려 탄소 배출량이 증가하고 있다. APG 측은 “상승하는 탄소 배출 비용으로 탄소 감축을 하지 못할 경우, 회사의 기업 가치가 줄어들 위험성에 노출돼 있기 때문에 투자자로서 탄소 감축을 신속히 요구한다”고 덧붙였다. 

    국내서는 ‘ESG 모범생’으로 간주되는 SK도 높은 해외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다. SK하이닉스는 2050년 탄소중립을 위해서는 매년 25만톤의 감축을 해야하지만 오히려 2019년에 비해 2020년 배출량이 늘어나 감축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단 분석이다. 공급망 전체, 자회사 투자 등 정보 공개의 범위도 넓어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SK그룹이 2030년까지 2억톤의 탄소 감축 공정 개선과 신사업 투자를 선언했지만(전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인 210억톤의 1%) 그에 걸맞은 정확한 계획이 아직 없다는 평이다. 특히 지주사인 SK㈜가 탄소배출이 낮게 보고되지만 사업지주회사로서 특성상 영업활동이 많지 않아서이고, 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연결대상 자회사인 SK에너지와 SK E&S를 고려하면 탄소배출량이 상당히 높다는 지적이다. 

    LG유플러스는 유럽의 보다폰(Vodafone) 대비 매출액 대비 두배 가량의 탄소배출을 하고 있다. APG는 통신사들이 직접적 탄소배출보다 공급망(Supply chain)에서의 탄소 감축 노력을 해야한다고 지적했다. 현대제철의 경우 철강 생산과정에서 다량의 탄소 배출이 불가피하지만 절대적인 탄소 배출량이 높은 점을 지적했다. 현대제철은 이번에 선정된 10개 기업 중 가장 많은 직간접 탄소배출량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철강사인 포스코는 APG가 이미 오랜기간 주주관여를 하고 있다. 

    한 ESG 업계 관계자는 “해외 투자자들은 국내 대기업들의 기후위기 대응이 글로벌 기준 대비 현저히 낮은 점을 답답해 하고 있다”며 “삼성은 물론이고 ‘열심히 하는 것 같은’ SK도 글로벌 스탠다드에 못미치는 상황으로, 한국이 이머징 마켓(신흥시장)도 아닌데 선두에 있는 기업들의 기후대응 액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다”고 말했다. 

  • 본격 투자자 압박 시작…삼성의 ‘액션’은 ‘대선 이후’?

    이번 APG의 주주서한을 시작으로 글로벌 ‘큰 손’ 투자자들의 본격적인 국내 기업에 대한 ‘기후위기 대응’ 압박이 시작될 것으로 관측된다. 가장 먼저 칼을 뽑은 APG가 이후 유럽 연기금 등 다른 투자자들과 공동행동에 나설 가능성도 내비치고 있다. 

    APG 또한 단순 ‘주주제안’에 그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APG가 과거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백혈병 논란이나 지배구조 문제에 대해 10년 가까이 관여(인게이지먼트)했던 것처럼, 이번 기후위기 대응 촉구도 ‘향후 10년을 보는’ 차원의 액션이라는 설명이다. 한국을 시작으로 아시아 전역의 책임투자를 늘릴 예정이다.

    실제 투자 회수까지 이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2023년 상반기까지 화석연료(석탄, 석유, 가스) 자산을 전략 매각하겠다는 네덜란드연기금(ABP)의 투자 정책을 바탕으로 APG도 투자자산 정리를 하고 있다. APG 측은 주식 매각을 고려 중인 기업들도 있지만,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공개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앞서 APG는 지난해 초 한국전력공사의 석탄발전 사업에 실망해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한 바 있다. 한때 한전 지분을 약 7% 이상 보유한 주요 주주였던 APG는 지속적으로 한전에 석탄발전소 투자 철회를 요구했고, 2017년부터 한전 지분을 조금씩 매각하다가 지난해 모두 처분했다.

    전사적인 시스템 전환이 필요한 탄소 감축은 비용의 문제가 크기 때문에 전적으로 오너 및 경영자의 의지가 크게 작용한다. 삼성의 ‘친환경 액션’이 늦어지는 것도 최종 결정권자인 이재용 부회장이 재수감 후 지난해 출소하는 등 그룹 내외부가 어수선한 탓도 크다는 평이다. 

    그룹의 RE100 가입 여부 등 탄소 감축 사안이 최고 경영진까지 보고가 되기도 했지만, 내부 사정으로 계속 미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삼성전자 내부에서도 의견이 엇갈리는 것인데, 소비자 대상 ‘이미지’가 중요한 IM(모바일)과 CE(가전) 부문에선 그룹에서 빠르게 결단을 내리길 원하지만 막대한 전기사용량을 쉽게 줄일 수 없는 반도체(DS) 부문에서는 당장의 탄소 중립은 어렵다는 입장을 보인다고 전해진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지금 RE100을 발표해도 글로벌 속도에 비해 늦은 편이고, 이미 국내에선 SK그룹이 앞서 간 상황이라 크게 임팩트가 있지 않아 타이밍을 고민 중일 것”이라며 “그룹 내부에서 준비는 하고 있겠지만, 당장 보단 대선 이후 새 정부에서 삼성의 환경 대응이 나오지 않을까 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