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쥐든 어차피 못 휘두를 칼자루 '국민연금 대표소송'
입력 22.02.22 07:00
취재노트
대표소송 둔 왈가왈부…대부분 실현 가능성 떨어져
수탁위 독립성·전문성 우려 여전…기형적 거버넌스
기금위 가입자 '대표성' 그대로 물려받은 수탁위 한계
  • 국민연금 대표소송 기능을 수탁자책임위원회(수탁위)로 몰아주는 것을 두고 왈가왈부가 극심하다. 그러나 대표소송 칼자루를 누가 쥐건 큰 변화는 없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수탁위가 기금운용위원회(기금위) 구성의 한계를 그대로 품고 태어난 조직이기 때문이다. 

    수탁위 스스로 알아서 대표소송 여부를 판단하고 실행한다면 국민연금 책임투자가 진가를 발휘할까. 아니면 소송 남발로 기업 활동은 위축되고 연금 사회주의 국가로 몰락하게 될까. 국민연금의 책임투자 정책에 변화가 있을 때마다 각계 반응은 마치 잘 짜인 역할극을 떠올리게 하는데 번번이 별다른 파격은 보여주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대표소송을 수탁위로 넘기려는 배경은 지난 2017년 국민연금 기금운용 체계 개편 논의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기금운용 거버넌스 개혁은 현 정부 출범 당시 국정과제 중 하나였다. 책임투자 활성화를 위해 국민연금 권한을 강화하되 전문성과 독립성, 투명성 등을 제고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원래는 국민연금법 개정을 통해 기금운용 체계를 손보려 했지만,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논의만으로도 연금 사회주의라며 여론이 들끓었다. 법률 개정엔 국회 통과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과거 기금위와 기금운용본부 체계로는 책임투자 확대에 따른 반발이 불가피하다. 그러니 신속하게 하위법령 지침 및 개정을 통해 기금위 내부 안건 형태로 논의가 이뤄졌다. 그렇게 기금운용 체계의 전문성과 독립성 확보 목적으로 수탁위가 출범했다. 

    독립성·전문성 우려는 여전…"기형적 거버넌스"

    전문성과 독립성 부족 문제는 수탁위 출범 이후에도 이어지고 있다. 오히려 기형적인 기금운용 거버넌스만 만들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금위는 비유하자면 국민연금의 이사회에 해당한다. 책임투자 원칙과 수탁자 책임활동에 대한 지침도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위가 결정한다. 이에 따라 책임투자를 실행에 옮기는 주체는 기금운용본부다. 

    수탁위는 여기서 다시 기금위 의사결정을 지원하고, 기금운용본부 책임투자를 검토하고 점검하는 역할을 맡았다. 당시로선 민간 전문가 9명으로 구성된 수탁위를 통해 법률 개정 없이도 전문성과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2020년에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기금운용지침을 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통해 명문화했다. 

    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수탁위와 같은 전문위원 조직을 기업에 비유하자면 삼성그룹의 준법감시위원회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라며 "이사회를 통해 기업이 올바르게 경영되고 있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따로 외부 조직을 두는 구조인데, 기형적 구조이고 유례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런 수탁위에다 유명무실화한 기금운용본부의 대표소송 권한을 일체 넘기겠다는데 왜 전문성과 독립성 문제가 불거질까. 기존엔 기금위와 기금운용본부만을 향하던 편향성 우려가 신설 조직에 그대로 옮겨붙은 모습이다. 재계를 비롯한 경제단체의 공포 장사에는 일절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금운용 체계 개편 논의에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근본 원인으로 보인다. 

    가입자 '대표성'이라는 금과옥조

    9명의 수탁위 위원은 각각 노동자, 사용자, 지역가입자 단체가 3명씩 추천해 구성된다. 기금위와 마찬가지로 위원 구성에서부터 각 가입자 단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채우고 있다. 기금위에 비해 자격 요건을 강화했다곤 하나 사회 갈등 구조를 국민연금 내부로 끌고 들어왔다는 점에서 도돌이표인 셈이다. 

    국민연금 내부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기금위가 됐건 수탁위가 됐건 아무리 전문성 있는 사람을 앉혀도 선발 과정에서 편향성이 부여된다"라며 "경영자, 노동자, 지역가입자 추천 몫을 주면 대표성이 확보되는 게 아니라 각 단체에 완장 추천권 하나씩 주는 셈이라 진영 논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기금위 내부에서도 이 같은 문제를 다루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복지부 측이 위원 전문성 강화 요건을 내놓자 각 가입자 단체 대표위원은 "정부가 임명하는 위원은 전문성을 가지고 있나?", "가난하게 태어나 공부 못한 사람은 기금 운용에 관여도 못하느냐" 등 반발이 있었다. 결국 각 가입자 단체 몫을 나눠주는 방식으로 수탁위에서도 '대표성' 취지를 살리자는 결론이 내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전문성과 독립성이 부족하단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이를 보완할 수 있는 외부 조직을 만든 건데, 대표성을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편향 논란을 그대로 놔둔 게 수탁위란 얘기다. 국민연금 바깥에서만 발생해야 하는 각 가입자 단체의 대립 구도를 그대로 심어놨다. 

    당연히 수탁위 내부 결속에도 바람직하지 않다. 실제로 수탁위 출신 한 관계자는 "수탁위 내부에서도 경영자단체 추천 인사가 반대하면 일 진행이 어렵다"라고 전한 바 있다. 어떤 단체에서 추천한 인사냐에 따라서 수탁위 내부에서도 편향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보인다. 

    국민 노후자산 운용 향방에 진영 논리가 개입되길 바라는 국민이 있을까. 결과적으론 이들이 누구를 대표하는지도 의심스러운 지경이다. 그런 수탁위로 대표소송 권한을 몰아주더라도 바람직하게 사용하길 기대하기는 어렵다. 기금위 아래 기금운용본부가 안 쓰는 칼자루는 수탁위도 휘두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