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닝쇼크' 논란 키운 후진적 IR 문화...국내 상장사도 '분기 가이던스' 필요
입력 22.02.23 07:00
국내 연간 가이던스 내놓는 상장사도 코스피 시총 상위권 뿐
미국은 매분기별 실적 가이던스 발표하며 투명성 높은데
애널 리포트에 의존한 분기 실적 가이던스…”LG생건 불성실공시 반복 우려”
  • 실적 시즌 '어닝 쇼크'가 이어지며 국내 상장사들의 후진적인 투자자관리(IR) 문화도 다시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실적 가이던스(전망치)를 제시하지 않고 애널리스트에 ‘귀띔’ 해주는 관례가 대표적이다. 

    매분기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하는 미국 상장사들과 대비되는 모습에 국내 상장사들도 시장과 투명한 소통이 요구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 15일 LG생활건강은 공정공시의무 위반으로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됐다. 실적 내용을 공시 전에 증권사에 알려 공정공시 의무를 위반했다는 논란이 불거져서다. LG생활건강은 “4분기 전체 실적에 대한 가이드 제공은 없었다”면서도 “면세점 채널에 한해 당사 가격 정책에 따라 12월 면세점 매출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음을 담당 증권사 애널리스트들에게 전달했다”고 밝혔다. 

    당시, 증권사에서는 LG생활건강의 목표주가를 평균 16% 넘게 낮추는 리포트를 일제히 발표했고 곧바로 주가는 추락했다. 하루 만에 주가가 13% 넘게 떨어졌다. 

    이를 두고 금융투자업계에서는 공공연한 관행으로, LG생활건강이 불성실공시로 지정된 데에 당혹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한 코스피 상장사의 IR 담당자는 “담당 애널리스트들이 분기 실적을 물어보고 실제 실적과 컨센서스와 괴리가 크면 대략적인 실적 분위기를 안내하며 톤을 조정하는 것이 IR 업무의 기본”이라면서 “IR 업계에서도 LG생활건강의 불성실공시 지정한 사태를 보며 업무를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이야기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번 LG생활건강의 사건도 숏(매도)을 치는 기관투자자가 LG생활건강의 실적발표 전 컨센서스보다 영업이익 숫자를 크게 부르자, 기업 입장에서는 주가 하락과 ‘어닝쇼크’를 방지하기 위한 과정에서 불거졌다는 후문도 나오고 있다. 

    이에 한국 상장사들의 실적 가이던스를 투명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상장사들은 분기 실적을 발표하면서 다음 분기의 실적 가이던스를 함께 발표한다. 보수적으로 전망한 실적치를 발표하고, 실제 실적은 전망치를 상회하는 일이 반복되며 투자자들과 신뢰를 쌓아가는 것이다. 

    반면, 국내 상장사들은 실적 전망치를 내놓는 경우도 드물다. IR 컨설팅 전문기업 IR큐더스에 따르면 2020년에 연간 가이던스를 제시한 기업은 93개 사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 2020년 당시, 상장 기업이 2268개에 달했던 것을 감안하면 약 4.1% 수준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국내 상장사들 중에서도 연간 가이던스를 발표하는 기업은 코스피200에 드는 기업들 정도”라며 “매분기 실적을 발표하는 기업은 10~20개 수준으로 극히 드물다”라고 말했다.

    기업 입장에서는 굳이 매분기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할 유인도 없다. 매분기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하고 그에 못 미치기보다는, 처음부터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하지 않고 ‘어닝 서프라이즈’를 내는 게 주가에 더 긍정적이기 때문이다.

    시장에 투명하게 공시하지 않으니, 애널리스트들이 IR 담당자에게 알음알음 실적 분위기를 물어보는 것이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2014년 CJ ENM의 공시 사전 유출사건 이후, 실적 분위기를 엿보는 것도 어려워졌다는 후문이다. 당시 CJ ENM의 IR 담당자는 애널리스트에게 미리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했고 애널리스트들은 펀드매니저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가 관계자들이 검찰에 고발당한 바 있다. 

    결국 애널리스트마다 실적 가이던스 차이가 벌어지는 일이 반복됐고, 이는 한국 시장의 신뢰도 저하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일례로 하이브 엔터테인먼트가 상장했던 2020년, 애널리스트들에게 실적에 대한 아무런 가이던스를 주지 않아, 당시 증권사마다 하이브의 다음해 매출액 전망치는 6000억원, 영업이익은 두 배 가량 차이를 보였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애널리스트들이 실적 분위기를 듣고 가이던스 정확도를 높이는 노력도 있어야 겠지만 기업들이 투명하게 실적 가이던스를 제시하는 것도 필요하다”며 “이러한 관행이 고착화되서 자리잡고 있은 이상 얼마든지 LG생활건강과 같은 사태가 반복될 수 있고, 이는 결국 한국 상장사의 실적을 제대로 예상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외국인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려하는 유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