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제재에 에너지·곡물가 요동…핀볼게임 된 韓기업 주가
입력 22.02.28 16:11
美·EU, 러시아 'SWIFT 제재' 본격화…韓 정부 동참
현대차·KIA 빠지고 방산·원전株 오르고…'예측불가'
곳곳에서 호재·악재 속출…탈원전도 비껴간 두산重
에너지·곡물發 인플레 압력 속 증시 변동성 지속 전망
  • 각국 정부가 시시각각 러시아에 대한 제재 결정을 발표하는 가운데 국내 기업 주가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 처하고 있다. 이번 전쟁이 러시아와 미국·유럽(EU) 등 서방 국가의 이권 문제와 맞닿아 있어 각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가늠하기 어려운 탓이다. 제재로 인한 직접적 영향은 제한적이겠지만 시장은 일부 기업엔 유탄으로, 동시에 일부 기업엔 예상치 못한 호재로 받아들이고 있다. 

  • 28일 현대차와 기아는 전 거래일 대비 3% 이상 하락 출발하며 각각 52주 신저가를 기록했다. 그러나 러시아 제재로 인한 현지 사업 타격 우려를 이미 수차례 주가에 반영한 데다, 오후 2시부터 외국인 투자자의 매도세가 주춤하며 양사 주가는 오후장 들어 약보합세로 회복했다. 이날 현대차는 전일보다 0.57% 오른 17만5000원, 기아는 제자리 마감했다. 

    현대차그룹은 다른 국내 기업에 비해 러시아 제재 노출도가 상대적으로 높다. 현대차 러시아 현지법인은 지난 2020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GM 공장을 인수하며 현지 사업을 확장해왔다. 지난해 말에도 360억루블(원화 약 5785억원)을 추가 투자한 바 있다. 

    반면 한국항공우주와 LIG넥스원, 한화시스템 등 방위산업체 주가는 장 막판까지 각각 전 거래일 대비 5~8%대 상승폭을 지켜냈다. 전쟁의 양상이 중장기적으로는 신(新) 냉전 구도를 형성할 수 있어 주변국 군비 증강이 예고되는 까닭이다. 27일(현지시각) 독일 올라프 숄츠 총리는 특별 방위 기금을 조성해 국방 예산을 GDP의 2%까지 끌어올리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예상하기 어려운 호재와 악재가 빗발치고 있다. 러시아가 일으킨 전쟁으로 인해 한국 기업 주가가 핀볼 게임에 놓인 형국이다. 

    이날 채권단 관리 체제를 졸업하기로 한 두산중공업 주가는 10.05% 상승한 2만800원에 마감했다. 대외적으론 문재인 정부가 갑작스레 원자력 발전의 중요성을 거론한 가운데 채권단 관리를 벗어난 덕이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러시아와 서방국 사이 에너지 패권 등 이권 문제와 맞닿아 있다. 

    26일(현지시각) 미국과 유럽 일부 국가가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차단하기로 결정했다. 이번 조치로 러시아 중앙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은 SWFIT 결제망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원유와 가스 등 에너지나 곡물, 원자재 수입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SWIFT 일부 차단에 비해 꺼내기 힘든 카드인 탓이다. 

    러시아는 지난해 GDP 기준 세계 11위 경제대국이지만 전 세계 GDP나 무역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 안팎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제재 조치로 인한 직접적인 경제 타격은 제한적일 거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원유와 가스 시장에서 러시아의 수출 비중은 각각 12%, 17%로 무시하기 힘들다. 유럽의 경우 가스 수입의 50%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는 세계 1위 밀 수출국이기도 하다.

    러시아가 전 세계 인플레 뇌관을 꽉 쥔 채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셈이다. 통상적으로 에너지 가격은 소비자 물가에 기여하는 비중이 10% 수준. 유가가 10% 인상할 경우 유로존 인플레이션율은 0.25% 상승하고, 신흥국의 경우 0.6%까지 상승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산 가스 현물 가격은 우크라이나 침공 당일 50% 증가했고, 브렌트유 가격은 8년 만에 100달러를 넘겼다. 밀 가격은 지난 2012년 고점까지 치닫고 있다. 

    이날 두산중공업 주가에 주어진 2가지 악재 중 하나인 원전 정책도 결국 전쟁과 무관하지 않다. 올 초 유럽은 원전을 그린에너지에 포함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탈원전 선봉에 섰던 독일이 역설적이게도 러시아산 가스에 에너지 주권을 넘겨준 결과란 목소리가 적지 않다. 최근 정부가 뜬금없이 원전 카드를 꺼내들며 두산중공업 부활 기대감이 치솟기까지 배경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지적이다. 

    운용업계 한 관계자는 "미국과 유럽 입장에서는 러시아 제재로 인해 자기 이권에 미칠 영향을 치밀하게 계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인플레 우려가 불 보듯 뻔한 상황인데, 유럽 재생에너지로는 러시아산 가스 대체가 힘겹고 미국산 액화천연가스(LNG)로 이를 보완하기도 힘들기 때문에 조선업이나 원전 관련주가 갑자기 주목을 받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전쟁으로 인한 기업·산업별 주가의 변동성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갈등 국면이 얼마나 장기화할지 가늠하기 어려운 가운데, 예상치 못한 변수가 속출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도체 업종의 경우 네온(Ne)가스 가격 급등 여부가 도마 위에 올랐다. 네온가스는 반도체 칩 생산 시 액침노광 공정에서 사용되는 완충가스의 일부로 지난 2014년 우크라이나 분쟁 당시에도 10배 이상 급등한 적이 있다. 지난 1월 포스코가 국내 최초로 국산화에 성공했지만, 국내 수요의 16%만을 담당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는 전 세계 네온가스 생산의 70%를 맡고 있다. 

    메모리 가격이 올라가고 있고 특수가스의 국내 재고가 충분하다고는 하지만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원가 비중이 높은 노광 공정 차질에 대한 우려도 나온다. 이 경우 코스피 등 국내 증시 전반에 부정적 영향이 불가피하다. 나아가 조선업의 LNG 선박 기대감과 마찬가지로 방산이나 원전 관련주에 대한 기대감, 완성차 업종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중장기 주가 방향을 가늠하기는 어렵다는 전망이다. 

    증권사 한 관계자는 "러시아군이 키예프에서 철수했다거나 체르노빌 지역 폭격으로 인한 밀 가격 급락 가능성 등 루머도 계속해서 퍼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어떤 기업이 악재를 맞이하고 수혜를 볼지 섣불리 예상하기 힘들기 때문에 당분간 변동성이 극심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